설마가 사람 잡는다. 오만이라 여겼던 180이라는 숫자는 현실이 되었다.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든 이들은 이제 책임을 말한다. 누군가는 자리를 내놓고 또 누군가는 정계를 떠난다. 패배의 멍에가 많은 이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가운데, 승자도 마냥 기뻐할 수 없다. 선거 다음 날 문재인 대통령은 “위대한 국민의 선택에 막중한 책임을 느낀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전례 없는 감염병의 유행 속, 정부·여당이 힘을 합쳐 지혜롭게 돌파구를 마련하라는 유권자들의 선택은 일리가 있다. 거대한 국가적 위기 앞에 하나로 결집하는 것은 민주국가의 특징이다. 100%가 불가능한 시스템 위에서도 가끔 국민적 단결이 이뤄지곤 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패배의 기원을 찾는 의문은 그 너머를 더듬는다. 미래한국당은 비례대표에서 33.8%의 득표율을 보였다. 더불어시민당과 열린민주당의 득표율은 합쳐서 38.7%다. 차이는 4.9%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당은 180석을 확보했고, 미래통합당과 미래한국당은 103석에 그쳤다. 만약 지역구 없이 의석 배분을 정당 득표율에 100% 연동하는 방식이었다면 어땠을까? 여당은 180석은커녕 과반도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유한국당 시절부터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반대했다. 지역구가 너무 소중해서였을까? 내심 과반 의석 확보를 자신했던 걸까? 그 속은 누구도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 결과는 누구나 알 수 있다. ‘설마 지역구에서 100석도 못 얻겠어?’는 현실이 됐다. 그래도 “비례정당 중에 우리가 1등”이니 괜찮다고 할까.

지난 총선에서 제3지대 바람을 일으켰던 주역들은 초라하다 못해 비참한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호남의 다선 의원들은 민주당 후보들 앞에 추풍낙엽과 같았다. ‘정치9단’ 박지원, ‘6선’ 천정배, ‘오뚝이’ 박주선까지 모두가 고배를 마셨다. 분열과 봉합과 재분열을 반복한 끝에 20석은 0석이 됐다. 한편 노회찬 의원의 죽음과 조국 사태를 거치며 갖은 부침에 시달렸던 정의당은 지난 총선과 같은 수의 의석에 만족해야 했다. ‘민주당 2중대’라는 조롱 속에 단식까지 강행하며 얻어낸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구원의 동아줄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순진했고, 또 안일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 정치는 더럽고, 치사하고, 비열하고, 냉혹했다.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9.6%의 지지를 받고도 1.5%의 목소리를 얻었다고 말하며 끝내 눈물을 보였다. 50년 썩은 정치의 불판을 갈겠다던 노회찬의 꿈은 이번에도 기약 없이 유예됐다.

다당제의 시대를 열지도 모른다던 제21대 총선은 더 강고해진 양당제를 불러오며 막을 내렸다. 국경 안팎으로 넘실거리는 질병의 위협 앞에 표심은 안정을 택했다. 반칙과 꼼수로 더럽혀진 선거제는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이제 거대 양당은 또 하나의 비열한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선거 끝나면 합당할 거라던 위성비례정당이 돌연 위성교섭단체로 둔갑할 모양이다. 나쁜 짓도 한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원칙 있는 승리가 가장 좋지만, 그게 어렵다면 원칙 있는 패배가 원칙 없는 승리보다 낫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는 원칙보단 승리에만 목마른 모양이다. 결과의 정의를 위해 원칙은 치워둬도 괜찮을 걸까. 그렇게까지 해서 만들어낸, 단 두 개의 커다란 목소리만 존재하는 국회에서, 작지만 다양한 목소리를 가진 이들은 누구에게 희망을 걸어야 하나.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