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R&D 예산 5조원 이상 삭감
-소규모 연구 많은 우리 대학 위기
-대학생들 "조건 좋은 유학 고민 중"
-일부 교수들 서명 운동 등 전개

갑작스러운 정부의 R&D(연구개발) 예산 삭감 기조에 전국 기초과학 연구계가 혼돈에 휩싸였다. 우리 대학도 예외 없이 예산 삭감의 ‘칼바람’을 피하기는 어렵다는 우려가 나온다.

과기부가 전년도 대비 2024년 R&D 예산을 16.6% 축소하겠다고 발표하자 기초과학계를 중심으로 반발이 확산되고 있다. (c)김채현 기자
과기부가 전년도 대비 2024년 R&D 예산을 16.6% 축소하겠다고 발표하자 기초과학계를 중심으로 반발이 확산되고 있다. (c)김채현 기자
지난 8월 22일 과기부는 R&D 예산을 33년 만에 줄이겠다는 내용의 ‘2024년도 주요 R&D 예산배분·조정안’과 ‘정부 R&D 제도 개선안’을 발표했다. (c)윤서영 기자
지난 8월 22일 과기부는 R&D 예산을 33년 만에 줄이겠다는 내용의 ‘2024년도 주요 R&D 예산배분·조정안’과 ‘정부 R&D 제도 개선안’을 발표했다. (c)윤서영 기자

지난 8월 22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발표한 ‘2024년도 주요 R&D 예산배분·조정안’ 및 ‘정부 R&D 제도 개선안’에 따르면 내년 전체 R&D 예산은 25조 9,152억 원으로, 올해 예산인 31조 778억 원보다 5조 원 이상 대폭 감소했다. R&D 예산은 1991년 이후 꾸준히 증가 혹은 유지 상태였으나, 33년 만에 삭감되는 것이다.

■예산 삭감 ‘날벼락’

정부의 예산 삭감은 기초과학 연구에 치명적이다. 현재 전체 R&D 예산은 국내 연구개발 전반을 위해 정부와 민간 기업이 지원하는데, 2021년 기준 전체 R&D 예산의 76.4%를 담당하는 민간 기업은 개발 부분에 치중하는 것에 반해 나머지 23.6%를 차지하는 정부에서 기초과학 연구를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 결정으로 1억 원 미만 연구과제에 대한 신규 지원이 중단된다. 소규모 연구실에서 이루어지는 실험 및 다양한 기초과학 분야의 연구가 단절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연구실 현장에서 운영비와 인건비를 충당하던 예산의 삭감으로 연구진의 활동에도 제약이 걸릴 수 있다.

결국 정부의 이번 결정으로 기초과학 연구를 진행하는 전국 학계에서는 ‘연구생태계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기초과학은 타 연구의 기반이 되는 연구를 담당하는데, 기초연구가 약화되면 전반적인 국내 연구의 선순환이 무너질 수 있단 것이다. 이에 기초연구연합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우리 대학 정옥상(화학) 교수는 “이렇게 갑작스럽게 시스템을 흔들면 연구생태계가 붕괴할 것”이라며 “기초연구의 발전을 계단에 빗대자면, 예산안 감소는 계단의 전체 층에서 중간층을 제거한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R&D 예산 감축의 이유로 △‘나눠 먹기식’ R&D 청산 △과학기술계 카르텔 해체를 주장한다. 소규모로 여럿을 지원하는 기존의 방식보다 일부 연구소에 연구비를 몰아주는 것이 기초과학 개발에 실효성 있는 대책이란 주장이다. 다만 현장의 연구진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나눠 먹기’나 ‘카르텔’이라는 용어는 ‘담합’ 등의 불공정한 절차를 밟았을 때 쓰이는 부정적 용어인 데다가, 기존에도 특정 연구에 대한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최소 3:1에서 최대 10:1 정도의 치열한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일정한 경쟁을 거쳐 해당 연구를 담당하게 되는데 이것이 나눠 먹기나 카르텔이라는 정부의 설명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우리 대학도 위기

예산 삭감안으로 대개 1억 미만에서 1억 이상 2억 미만의 소규모 연구를 진행하는 우리 대학의 기초과학 연구소는 직∙간접적인 타격에 직면해 있다. 우리 대학 자연과학대 소속 기초과학 분야의 연구소는 △극한물리연구소 △기능성물질화학연구소 △기초과학연구원 등을 포함해 총 17개로 BK21 사업단을 포함하면 총 22개다. 이들은 지금도 넉넉지 않은 예산이 15~20% 가까이 삭감된다는 소식에 상당한 타격을 예상한다. 정 교수는 “특히 지방대인 우리 대학은 큰 서울권 대학들에 비해 연구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에 손실이 더 클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12월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발간한 ‘2021년 우리나라와 주요국의 연구개발투자 현황’에 따르면, 최근 5년 간 정부 R&D 예산이 총 R&D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대를 유지하고 있다. [출처: 2021년 우리나라와 주요국의 연구개발투자 현황 갈무리]
지난 12월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발간한 ‘2021년 우리나라와 주요국의 연구개발투자 현황’에 따르면, 최근 5년 간 정부 R&D 예산이 총 R&D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대를 유지하고 있다. [출처: 2021년 우리나라와 주요국의 연구개발투자 현황 갈무리]

R&D 예산 삭감안이 실시되면 우리 대학의 과제와 실적은 줄어들 전망이다. 우리 대학 R&D 사업 예산 수입을 측정하는 산학협력단 정지영 재정팀장은 “정부의 R&D예산 축소 결정으로 인해 관련 부서에서 예산 지원이 조정될 것”이며, “연구를 지원해 주는 기관인 산학협력단에서도 △연구자 입장에서의 비용(과제 감소, 학생연구자 지원비) △간접비 △연구자 지원 사업 등에 제공하는 지원 규모가 연쇄적으로 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예산 축소의 최대 피해자는 △대학원생 △박사후연구원 등의 젊은 연구자로 꼽힌다. 현재 삭감안에 따르면 연구비 산정률이 약 20%에도 못 미치는 상황에서 △신진연구비 △생애첫연구비 △기본연구비 등 신규 임용된 연구자들을 위한 신규 과제액이 삭감되기 때문이다. 우리 대학 A(물리학, 19)씨는 “연구비 지원 감소로 취업 준비 시 진로에 대한 많은 걱정이 들어 더 좋은 조건을 가진 외국으로 유학을 가는 것도 고민하는 중”이라고 전했다.

향후 연구원을 꿈꾸는 재학생들이 꿈을 키울 수 있는 다리가 없어졌단 지적도 인다. 대학원 진학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자연과학대의 학생회 측은 “대학원에 진학하는 이유는 연구를 통한 역량을 쌓기 위해서인데, 연구비 감소에 따른 학생 인건비 감소는 학생들이 연구에 몰두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전했다.

■정쟁에 살길 찾는 과학계

기초과학 연구계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현재 R&D 예산에 대한 논의가 그저 정쟁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과학 기술의 발전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갑작스러운 조정은 기초과학 연구의 핵심인 △지속성 △다양성을 고려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기초연구는 한 세기가 필요한 학문”이라며 “우리나라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반적 정책 방향성도 함께 바뀌는 데 이처럼 과학이 정치와 함께 움직이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연구자들은 학문적인 시각에서 기초과학의 발전 중요성을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 대학 정세영(광메카트로닉스공학) 교수는 “오랜 세월이 지나 보면 순수학문적 결과가 기술적, 사회적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며 “순수학문에 대한 열정이 식는 순간 모든 공학과 관련 산업이 치명적으로 타격을 받게 될 것임을 정부와 대학 당국이 잘 알고 순수학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전했다. 실제로 이러한 중요성을 인정한 일본은 기초연구비를 지속해서 높이고 있고, 독일은 정부 지원 기초연구비가 1년에 4.5%씩 성장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기초과학의 생사가 달린 문제에 현재 우리 대학을 비롯한 과학기술계는 적극적 대응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 9월에는 제52대 대한화학회장이기도 한 정 교수를 중심으로 기초연구 예산 재검토 요구 서명운동을 실시하고, 결과를 국회에 전달하기도 했다. 정 교수는 <채널PNU>와의 인터뷰에서 “정부의 해당 결정에 기초과학계가 크게 반발하며 격양된 분위기”라며 “국회에서 ‘기초연구 강화 방안’ 논의 토론회를 개최하고, 과학기술위원회와의 만남을 가지며 반대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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