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는 <에티카(Ehtica)>에서 연민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자신과 비슷하다고 상상하는 타인에게서 일어나는 해악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라고. 즉, 타인의 아픔을 함께 슬퍼하는 것이다. 나는 사회를 연민과도 같은 아릿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언젠가부터 정의로운 사회란 무엇일까를 고뇌했고, ‘정의로움’이란 약자를 위한 법이 탄탄히 마련된 것이라 생각했다. 힘의 논리에서 살짝 벗어난 사람들이 약자가 아닐까 하며.

이런 정의가 나의 오만한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며 약자는 상대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여실히 느꼈다. 여느 때와 같이 부서 기획을 하던 도중 ‘청년’이라는 소재가 떠올랐다. 언뜻 보기에 대학은 낭만적인 청춘으로 물들어진 청년의 터전이고, 사회는 청년의 혈기왕성한 경제활동을 보장하는 토대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회로부터 안전한 테두리를 보장받고 있지 못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원룸촌과 밀리는 월세, ‘서연고서성한’을 읊는 대학생 간의 끝없는 갈등 재생산까지. 이뿐만 아니라 ‘82년생 김지영’을 보며 20-30대 여성을 ‘꼴페미’라 혐오하는 사회도. 나라를 이끄는 주축이 청년이라 말하지만 실상은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서로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약자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었고 어떤 집단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나조차도 약자가 될 수 있었다. 

이후 기획과 발행을 거치는 일련의 과정 속 왜 약자를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찾아 나갔다. 쓰라린 인터뷰를 이어가던 순간들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의 사람으로서 존중받고 싶다는 공통된 열망을 위해서. 무엇보다 모두가 약자가 될 수 있는 사회에 서로를 지탱하기 위해서. 나는 이들을 조명해야 할 필요성을 이제는 단언할 수 있다. 어쩌면 그 누구도 나의 기사를 읽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학보사 기자라는 이름 하에서 글로 사회를 비추고 싶다. 나의 작은 기사가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한 도끼’가 될 수 있기를. 단 한 편의 기사일지라도 ‘스스로 수고했다’는 말을 남길 수 있기를 다짐한다.

나의 거친 포부와 달리 펜촉은 여전히 연약할 따름이다. 약자들을 울림 있는 목소리로 전달하고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기에 나의 글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따뜻한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컸으리라. 글쓰기가 아직도 어렵고 두렵지만 이제는 맞서 보고 싶다. 타인의 평가에 전전긍긍하기보다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어쩌면 타인이 아닌 나를 위로하는 글을 쓰고 싶다. 기자(記者)라는 말처럼 순간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묵묵히 달려 나갈 수 있기를. 등대처럼 어두운 밤을 잔잔히 비추는 기사를 써 내려가기를. 유약한 나는, 오늘도 비릿한 현실을 맡보며 자박자박 걷는다.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두운 것처럼 이내 만개할 찬란한 꽃봉오리를 위하여, 오늘도 나는 타자기에 손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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