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공원 안 쪽에 부산광복기념관이 자리해 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독립운동의 역사적 중요성이 다시 일깨워지고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전국적으로 많은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그 흐름에서 부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많은 독립운동이 부산에서 이뤄졌지만, 부산의 독립운동 역사를 기념하는 공간은 부재하다. 


부산에서 외친 함성

1919년 서울 3·1운동 시작과 함께 부산에서도 활발한 독립운동이 이뤄졌다. 3·1운동 발생 직후 서울 학생 대표가 부산으로 내려와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며 시위를 독려했다. 이에 부산진일신여학교 주경애 교사와 박시연 교사 지도 아래 학생들이 독립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부산진일신여학교 의거는 당시 경상남도 3·1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동래고보 학생의거는 일신여학교의 의거가 있기 전인 3월 7일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당시 동래고보에서는 김병규 교사가 학생들에게 몰래 한국사를 강의했기 때문에 학생들의 민족의식은 상당히 고취돼있었다. 학생들은 3월 13일 오후 2시 동래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후에도 동래시장에서 시위를 지속해서 전개했다. 부산진과 동래지역의 학생과 민중들의 의거는 부산 인근 지역으로 알려졌고 해당 지역민들도 시위대열에 동참했다. 특히 구포의거는 청년 학생들의 주도로 장꾼 등 일반 민중들이 참여하며 구포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적극적 시위였다.

1920년 9월 14일에는 부산경찰서폭탄투척의거가 일어났다. 일명 ‘진영사건’등으로 인해 많은 의열단 소속원들이 부산경찰서에 붙잡히자 이에 대한 보복을 위해 계획한 것이다. 이에 박재혁 의열단원은 중국 고서적상인으로 위장해 부산경찰서 하시모토 슈헤이 서장과 면담을 요청해 만났으며 이때 폭탄을 투척해 일본인 서장을 즉사시키고 경찰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 사건은 독립운동사에서 의열단의 의기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1940년 11월 23일에는 노다이 사건으로 잘 알려진 부산학생항일의거가 일어났다. 이날 경남학도전력증강 국방경기의 심판장인 노다이 소좌가 일본인 학교에만 유리한 판정을 계속해 분노한 동래중학교(현 동래고등학교)와 부산제2상업학교(현 개성고등학교) 학생들의 주축으로 1,000여 명의 학생들이 시가행진을 벌이고 노다이 관사를 습격했다. 일제의 통제가 극에 달한 시기에 일어난 대규모 항일 학생운동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높다. 

있어도 제 역할 못해

이처럼 부산에서도 많은 독립 운동이 일어났지만 부산의 독립운동사를 기릴 기념관은 거의 없다. 다른 역사적 사건과 비교해도 적은 편이다. 부산의 경우 임진왜란 관련 장소는 곧잘 떠오르는 편이다. △송상현 광장 △정발장군동상 △충렬사 △동래읍성 등 비교적 부산의 도심에 큰 규모로 있으며, 꾸준히 관리도 되고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독립운동 기념비나 탑의 경우 비교적 외진 곳에 뿔뿔이 흩어져 있고, 부산 독립운동사를 한눈에 알 수 있는 기념관은 전무한 상태이다. 현재 부산 중구 동관동에 백산 기념관이 마련돼 있지만, 백산 선생의 업적을 주로 다루고 있어 부산의 전체적인 독립운동사를 알기는 어렵다. 부산 서구 동대신동에 있는 광복기념관은 전시공간이 부족하고 접근성이 좋지 않아 기념관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광복회 부산지부 권병관 지부장은 “광복기념관은 규모가 작아 사람들이 방문해도 독립운동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라며 “특히 부산의 독립운동에 대한 전시물이 부족한 상태다”라고 전했다. 

35년의 투쟁 조명돼야

독립운동 기념 공간이  부족해 부산의 독립운동사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부산은 일제강점기 당시 부산항을 통해 이뤄진 일제의 수탈을 적나라하게 목격한 만큼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항일 투쟁이 있었다. 그러나 이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교육할 곳이 없어 부산 독립운동의 역사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 있다. 강대민(경성대 사학) 명예교수는 “부산에는 독립운동 관련 기념물이 전부 흩어져있어 부산 독립운동의 역사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라며 “독립운동기념관은 연구기관의 역할로써 지속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해 독립운동사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관심을 받을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이러한 상황은 지역 역사가 왜곡돼 보이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부산은 부산항으로 인해 일본과 잦은 교류를 했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부산이 일본 지배에 순응한 지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일본과 가깝게 있어 가장 먼저 일본과 개항한 지역인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의 인적·물적 자원의 수탈로 반발심이 컸던 곳도 부산이라고 설명한다. 강대민 명예교수는 “부산항 때문에 일제의 수탈을 가장 크게 체감한 사람이 부산사람이었다”라며 “일제 지배부터 해방 때까지 35년간 끝없이 독립운동을 했지만 이를 알려주는 공간이 없어 대부분이 모르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남은 숙제 많아

부산에 독립운동 기념관을 조성하자는 요구는 이전부터 있어 왔으나 번번이 좌절됐다. 기념관을 건립하려면 국비 지원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현충 시설 건립 사업은 <보조금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 따라 2004년부터 지방이양사무로 변경돼 국고보조금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 탓이다. 현충 시설 건립을 위해선 민간이 사업 주체가 될 경우에만 총사업비의 30%내에서 민간경상보조금을 지원받을 수 있다. 민간이 주도해야만 국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현재 광복회 부산지부는 ‘부산항일독립운동기념공원 추진 준비 위원회’를 통해 민간차원의 조직을 꾸려나갈 계획이다. 광복회 부산지부 김경수 사무국장은 “현재 추진 준비 위원회를 모집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라며 “올해 안에 모집하는 것이 목표다”라고 전했다. 

이에 부산광역시(이하 부산시)는 독립기념 공간 마련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부산시청 관계자는 “독립기념관 업무는 국가사무이지만 기념관이 지어지면 관련된 자료를 연구할 수 있고 독립의 정신을 기릴 수 있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국비 지원 및 행정적 절차가 요구되고 제대로 논의된 바가 없어 실현 여부는 미지수다. 부산시청 관계자는 “아직 민간에서 위원회를 추진하고 있는 단계이기 때문에 실현 여부를 말하긴 힘들다”라고 말했다. 

부산시가 부산 독립기념관 건립에 소극적인 것도 사업 진척이 더딘 이유로 꼽힌다. 보훈 예산은 민생 정책들에 비해 우선순위에 밀려난다는 것이 부산시의 입장이다. 이에 강대민 명예교수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독립운동이 1순위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산시청과 구청,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이 필요하다”라며 “제 2의 도시라고 불리는 부산에 제대로 된 독립기념관이 없는 것은 창피한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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