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6월 23일 야심한 밤, 당시 태국의 군주였던 라마 7세의 이복동생 보리팟 왕자 저택 맞은편에 완전히 무장한 해군부대가 늘어섰다. 존재 자체로 위협적인 군함 한 대도 그 옆에 자리 잡았다. 반항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이자 협박이었다. 쿠데타 세력은 다음 날 아침까지 정부 관료들을 강제로 잡아들였다. 그들은 성명문에서 스스로를 인민당이라 칭하며 쿠데타의 정당성을 역설했고, 라마 7세에게 입헌군주의 지위를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한 가장 큰 원인은 국가 재정 위기였다. 라마 7세 이전 정권부터 이어진 재정 문제와 1930년대를 강타한 대공황은 절대 왕정을 흔들었다. 라마 7세가 대책을 세웠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또한 그 시기 태국 유학생들 사이에는 민주화가 큰 논쟁거리였다. 특히 프랑스 유학생들이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중 △법학도인 쁘리디 파놈용(Pridi Phanomyong) △정치학 전공인 쁘라윤 파몬몬뜨리(Prayoon Pamornmontri) △군사학 전공인 쁠랙 킷따상카(Plaek Kittasangka)가 태국 개혁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1927년 2월, 이들과 뜻을 같이하는 유학생들과 파리 주재 외교관들이 파리에서 자리를 가졌다. 이들은 태국 국민들이 문맹이고 정치적 의식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 기존의 국왕 체제에 크게 의존한다는 점을 고려해 대중 운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 때문에 쿠데타 세력은 군부 세력을 이용한 쿠데타를 결심했다. 주요 세력들은 태국으로의 귀국한 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쁘리디 파놈용은 법무부에 일하며 절대 군주제에 불만을 가진 공무원을 끌어모았다. 1931년 후반 몇몇 시니어 장교들도 경제 위기, 혈통차별로 인한 승진의 어려움 등의 이유로 쿠데타에 합세했다.

이렇게 모인 세력을 바탕으로 쿠데타는 성공했다. 쿠데타 소식을 들은 라마 7세는 태연자약했다. 그는 6월 26일에 쿠데타 지도부와 만났다. 쁘리디 파놈용은 입헌 군주제 수용을 요구하는 방식에 대해 국왕에게 용서를 구했고, 라마 7세는 그를 용서했다. 라마 7세의 서명으로 태국의 정치 체제는 입헌 군주제가 됐다.

1932년 태국의 쿠데타는 평화적이었고, 태국 현재의 정치 형태인 입헌군주제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이룩해내지 못했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 입헌군주제가 된 이후 군부 주도 세력과 민간인 주도 세력 간의 갈등이 일어났고, 1933년 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이로 인해 태국은 의회 민주주의가 아닌 군부 권위주의 체제로 전환됐다. 서경교(한국외국어대 정치외교학) 교수는 <태국의 정치변동과 민주주의: 주요 정치 행위자를 중심으로>에서 ‘1932년의 쿠데타는 절대왕정을 붕괴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태국에 민주적 정치 체제를 정착시키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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