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The Scream>(1893作)
(2)<Judith I>(1901作)

유명한 소설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는 상징주의를 두고 ‘이 세상이 아닌 어딘가와 같은 분위기를 낸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상징주의 화가들의 공통점 단 하나는 현실이 아닌 곳을 지향하는 태도다. 상징주의는 1880년대를 전후하여 20세기 초까지 유럽 전역을 풍미한 미술 운동을 말한다. 이 운동의 핵심은 당시 서구 사회에 만연한 물질주의와 과학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에서 탈피해 인간 내면의 세계와 상상력, 그리고 감각의 세계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상징주의 미술가들은 이전 세대인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했으며 비가시적인 세계를 탐구했다. 신화와 전설, 불안과 공포, 그리고 꿈과 무의식과 같은 주제를 가져와 그림으로 표현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직관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다. 

유럽의 상징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인물은 바로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다. ‘나는 보는 것이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는 뭉크의 말처럼 그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을 재현하려 한 인상주의자들과 다르게 과거에 체험한 것을 기억에 의존하여 표현하려 했다. 뭉크의 유명한 작품 (1)<The Scream>(1893)의 탄생을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해질녘 친구들과 길을 걷는데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피곤함을 느껴 걸음을 멈추고 난간에 몸을 기댔다. 불과 피가 마치 혀처럼 검푸른 피오르 위에 펼쳐졌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뒤쳐진 채 공포로 몸을 떨었다. 그때 자연의 엄청나고 무한한 비명을 들었다.

그가 <The Scream>(1893)을 탄생시킨 체험을 이렇게 설명한 이유는 회화의 목적은 가시적 현실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저 작품은 생각이나 느낌의 형태로 관객의 머릿속에 풍부한 연상을 불러일으키면 된다고 믿었다.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또 다른 인물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다. 클림트는 당시 폐쇄적이었던 오스트리아 빈 미술계에서 분리된 빈 분리파의 일원이었다. 빈 분리파는 상징주의와 함께 유연한 선으로 장식된 철제 난간을 특징으로 가진 아르누보 양식을 내세웠다. 에로티시즘과 관능적 감각세계의 표현은 그의 작품 특성 중 하나다. 클림트는 인간의 근심과 절망, 성 그리고 죽음을 다양한 색의 장식무늬를 통해서 강조했다. 이는 당대의 유명한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무의식과 성에 대한 이론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의 작품 (2)<JudithⅠ>(1901)은 이런  파격적인 에로티시즘을 잘 표현한다.

과학 기술의 발전에 대한 신념이 19세기에 가득 차 있었다. 상징주의는 이러한 사실주의·인상주의·과학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탄생한 운동으로 급속한 산업화, 도시화로 뿌리를 잃은 사람들이 느끼는 극심한 정체성의 위기를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한다. 대도시의 환경에 적응할 수 없었던 이들이 냉혹한 현실에서 환상의 세계로 정신적 피난을 떠난 것이다. 상징주의는 도피적, 퇴행적 성격으로 인해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세계적 규모의 운동이었고 현대 미술의 바탕이 됐다. 또한 고갱과 나비파의 상징주의는 프랑스에서 야수파가 탄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미술칼럼니스트 이민수는 네이버캐스트 <사조와 장르>에서 ‘상징주의 이후 미술가들은 더 이상 외부세계 재현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자유롭고 순수한 그들만의 세계를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상징주의를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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