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6월 6일 아침, 경찰들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단 사무실에 들이닥친다. 무서운 얼굴을 한 경찰들은 사무실 안의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가한다. 책상 위의 서류는 찢겨 바닥에 흩어져있다. 서울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의 지휘로 시내 각 경찰서에서 차출된 경찰들이 반민특위 조사단을 습격한 것이다.

1948년 4월 국회는 친일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기초특별위원회(이하 반민특위) 구성안을 가결한다. 그해 조직된 반민특위는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검거하는 활동을 시작한다. 반민특위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취급한 자의 대부분은 경찰이었다. 친일 경찰들은 자신의 동료들이 체포되자 반민특위의 활동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또한 검거된 친일경찰 중 이승만의 정치기반이었던 경찰 간부들이 다수 포함돼있었다. 이에 이승만은 반민특위 활동을 지지하는 국회의원들을 구속하고 반민특위의 활동을 지적하는 담화문을 발표한다. 흔들리는 자신의 입지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반민특위의 활동은 경찰들의 습격으로 중단된다. 친일 경찰의 핵심이었던 최운하를 체포했기 때문이다. 서울경찰서장들은 반민특위가 최운하를 체포하자 최운하의 석방을 요구한다. 반민특위가 서울경찰서장들의 요구를 거부하자 경찰들은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한다. <제헌국회 속기록>에 따르면 이승만이 경찰들에게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도록 지시를 내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 습격으로 인해 반민특위의 실질적인 활동이 중단된다. 1949년 10월 반민특위 폐지법이 공포됨에 따라 반민특위는 해체됐다.

1949년 7월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공소시효를 1949년 8월까지 한다’는 개정안이 통과됐다. 이로 인해 반민특위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취급한 600여명 중 절반도 못 미치는 200여명이 기소됐다. 이중 체형을 받은 10여명도 곧 풀려났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은 1951년 2월 폐지돼, 친일파 청산은 현재까지 미완의 과제로 남게 됐다.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친일파 청산 그 좌절의 역사>에 따르면 ‘친일파를 처벌하는 것은 무너진 민족정신을 바로 세우고 정의를 확립하는 데 의의가 있다’며 ‘반민특위는 친일파세력을 처벌하고자 하는 민중의 요구를 실현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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