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5월 28일 모내기 준비로 바빠야 할 민중들의 손에는 농기구 대신 무기가 들려있었다. 금방이라도 비릿한 피 냄새가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구한말 조세 수탈과 함께 천주교도에 대한 제주 민중의 저항인 이재수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제주도민은 계속되는 흉년과 서울에서 내려온 관리들의 부패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 강봉헌이 세금을 수탈하는 과정에서 일부 천주교도들이 편승하기도 했다. 또한 천주교도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게 된 토지 내에 있던 신당과 신목들을 없애면서 도민들의 배타적인 감정을 더욱 자극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정군수 채구석은 오대현과 이재수 등과 결탁하여 상무사를 설립했다. 상무사는 원래 △상업 △국제무역 △기타 상행위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설립됐던 기관이지만 채구석은 비밀결사를 목적으로 이를 설립했다. 그들은 도민회를 열어 봉세관의 탐학과 천주교도들이 저지른 비행을 규탄했다. 민중 지도자로 오대현을 선출한 그들은 제주 목사에게 이 사건을 호소하기 위해  대정현을 떠났다. 그 소식을 접한 천주교도 800여 명이 총과 칼로 무장한 뒤 명월에 있는 민회를 습격해 오대현을 비롯한 우두머리 6명이 납치됐다. 지도자를 잃은 민중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이재수였다. 그의 지휘하에 그들은 대정현으로 철수해 장정과 포수를 모았다. 천주교도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대항했지만, 제주도민들은 끝끝내 성을 함락시켰다. 이재수는 천주교도들의 죄상을 낱낱이 밝히고 숨어 있는 천주교인을 색출해 처단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이틀 동안 그들에게 피살된 천주교인이 300명이 넘었다.

이재수의 난은 외래 종교의 횡포에 대한 민중의 반항이었다는 점과 이후 국제 문제로까지 확대됐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안산향토사연구소 정진각 전 소장은 논문 <1901년 제주민란에 관한 일고 : 소위 신축교난의 발생 원인을 중심으 로>에서 ‘또한 제주도민의 단합과 외세에 대한 단호한 항거로서 그들의 단결과 자주적 역량을 보여준 민란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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