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명해 보이는 일상을 의심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통찰력 있는 의심만큼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붓타는 왕자로서의 호화로운 삶을 버리고, 도를 깨우치기 위해 보리수 아래에서 고행을 했습니다. 부와 욕망의 껍질을 벗겨냈을 때 삶의 본질은 고난의 연속에 다름 아니었기에, 그에게는 고행 역시 충실한 삶이었습니다. ‘소유’를 포기하는 일은 물질주의가 만연한 현대사회에서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삶이 곧 소유의 과정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20대의 대학생활은 그래서 고달픕니다. 부모의 품을 벗어나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갖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고뇌해야 하는 삶이니까요. 높은 스펙을 쌓아야하고, 전공지식을 배워야 하고, 애인을 사귀어 하고, 졸업장을 따야 하고, 졸업하면 직장을 가져야 하고, 차와 집을 소유해야 하고, 배우자와 가정을 꾸려야 합니다. 끝없이 소유해야하는 것들의 행렬 속에 진정한 삶의 가치와 보람은 주어지는 것일까요? 에리히 프롬은 이처럼 소유에 대한 탐닉으로 인해 병든 현대사회에서 상실되어버린 ‘존재’의 양식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소유냐 존재냐』에서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을 다음과 같이 대비합니다. 배움에 있어서 소유양식에 젖은 사람들은 강의의 내용을 오직 단단히 기억하거나 노트를 소중히 간직함으로써 지키려고 합니다. 그들에게 배움의 내용은 고정된 이론일 뿐, 자신의 생각으로 흡수되어 그들의 사고를 폭넓게 하지는 못합니다. 반면 존재양식으로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열린 사람들은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방법으로 강의에 반응합니다. 그들의 머릿속은 새로운 질문, 새로운 개념, 새로운 호기심과 기대로 가득 차있고, 학습과정은 곧 산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입니다. 존재양식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지식이란 곧 깨달음이고 지혜이며, 따라서 모르는 것 또한 앎의 일부임을 자각합니다.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겸허한 깨달음이 그들에게는 앎과 존재를 향한 새로운 추동이 됩니다.


  물론 성인(聖人)이 아닌 우리가 존재양식만을 따르며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유양식을 따르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영리한 삶인 양 몰아가는 이 사회에서, 소유할 필요도 없고 사회에 의해 소비되지도 않는 자신의 모습을 꿈꿀 자유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자유는 분명 더 많이 가지는 것에서 나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가장 가진 것 없고 불안정한 생활을 하던 20대의 고민들이 지금도 저의 사유에 깊이를 더해주는 재료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존재양식의 삶을 향한 고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얻을 수 없더라도 땀 흘리며 산에 오르는 도전과 기쁨을 만끽하는 삶, 산을 내려다보며 정상에 오른 희열과 호연지기를 느낄 수 있는 삶, 그런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가짐보다는 비움의 자세일 것입니다. 대화하기 위해 독서하고, 사람과 가슴과 가슴으로 만나며 살아갑시다. 적극적인 저항이든 조용한 깨달음이든 가지지 않음의 지혜는 바로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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