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기는 의사를 상징하는 물건 중 하나다. 의사는 청진기로 심장과 폐 등 인체 내부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환자의 상태를 파악한다. 의사가 환자가 내는 소리를 듣듯이 선거기간 동안 후보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국민의 소리를 듣겠다고 외쳤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국민의 소리를 듣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많은 후보는 엄청난 용량의 스피커를 동원해 주구장창 자기가 할 말만 시끄럽게 읊어댔다. 진정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어쨌건 선택은 끝이 났다.
사람들은 종종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대형 사고가 발생하면 정치권에서는 현장에 얼굴을 비치는 데에 급급했다. 하지만 소통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듣지 않으면 제아무리 열심히 현장을 뛰어다녀도 불통이 될 수밖에 없다. ‘보고 듣는다’고 하여 보는 것을 먼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면 ‘듣고 본다’고 하는 것이 옳다. 뇌에서 처리하는 시각정보의 양이 많아 시각이 청각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고 문명을 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말하고 듣는 능력이었다. 옛날에는 청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면 말을 배우기 어려워 지적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dumb’를 ‘멍청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했고, 수학에서 무리수(無理數)를 나타내는 surd(불합리한)도 라틴어의 surdus(deaf)에서 나온 것처럼 청각장애는 시각장애와 달리 사람을 비정상적으로 만들었다.
인간이 소리를 의사소통에 사용해 온 것은 단위 에너지 당 전달하는 정보의 양이 많기 때문이다. 100년 동안 쉬지 않고 열심히 떠든다고 하더라도 그때까지 사용된 소리에너지로는 물도 한잔 끓이지 못한다. 물론 말을 하면서 다양한 동작과 근육을 사용하기 때문에 수다를 떨고 나면 허기지는 일도 생기지만 소리 자체가 지닌 에너지양은 매우 작다. 소리는 귀로 들을 수 있는 가청주파수 대역이 커서 다양한 정보를 전달하는데 용이하다. 가장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눈이 감지하는 진동수의 최솟값과 최댓값의 차이가 2배밖에 안 되지만 귀는 1,000배나 넓은 영역을 감지할 수 있다.
소리는 단순한 정보뿐 아니라 감정도 전달한다. 산사의 적막을 깨우는 아름다운 종소리는 심신의 피로를 풀어준다. 에밀레종으로 널리 알려진 국보 29호인 성덕대왕신종의 소리는 깊은 여운을 남긴다. 독특한 종소리로 인해 종을 만들 때 아기를 시주해 넣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종에서 뼈의 구성 성분인 인(P)은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종소리의 비밀은 아기의 한 맺힌 절규가 아니라 맥놀이 현상에 의한 것이다. 신라의 장인들은 음파의 간섭현상에 대해 알지는 못했지만 종을 칠 때 생기는 여러 울림을 이용해 맥놀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맥놀이 현상은 진동수가 약간 다른 두 소리가 서로 간섭을 일으켜 왕왕거리며 울리는 현상이다. 두 개의 파동이 만나 중첩되면 진폭이 커지거나 작아지는 간섭이 일어난다. 두 파동의 위상이 반대일 경우에는 상쇄간섭이 일어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위상이 같을 경우에는 소리가 커지는 보강간섭이 일어난다. 우리가 듣는 대부분의 소리는 많은 파동이 중첩된 것이다. 기타 줄을 튕기면 하나의 대표적인 진동만 보이만 사실은 그 속에 많은 진동이 중첩되어 하나의 음을 만들어낸다.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아무리 사소한 울림이라도 버리지 않고 수많은 다른 울림과 함께 잘 중첩시켜 조화로운 소리를 만들어 냈기에 명기(名器)가 될 수 있었다.
상쇄간섭처럼 여야가 서로 반대 목소리만 낼 경우 아무 일도 안 된다. 그렇다고 모든 일에 한 목소리만 내면 그것은 전체주의다. 민주주의는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소리가 어울려 맥놀이처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부디 20대 국회에서는 서로의 의사를 존중하여 아름다운 화음이 창출되기를 간곡히 기원해 본다.

최원석 과학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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