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로 재현하지 못할 영역이 있을까?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영역은 없지만 윤리적으로 재현하지 말아야 할 영역은 있다는 게 평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를테면 신문, 방송 등의 대중매체는 시신의 이미지가 그대로 노출되는 것을 금지한다. 타인의 고통을 희귀한 구경거리로 재현하는 것은 사악한 짓이라는 것이다. 주검 이미지는 보여지는 자의 존엄뿐 아니라 보는 자의 존엄도 위태롭게 한다. 남의 고통을 구경하려는 우리의 타고난, 천박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시선의 욕망은 이미지의 재현금지라는 보도원칙으로 가까스로 통제된다. 그래서 우리는 숱한 비극적인 사건의 희생자들의 주검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원칙에도 예외는 있는 법. 작년, 전 세계인들은 터키 해변으로 떠밀려온 시리아 난민 꼬마의 시신을 똑똑히 보았다. 저널리즘의 윤리에 따라 첫날 보도에서 쿠르디의 시신에 덧씌워진 모자이크는 다음날 깨끗이 지워졌다. 세 살짜리 꼬마의 시신 이미지는 그 자체로 이미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켰다. 난민유입을 제한해왔던 유럽 정상들의 결정을 단숨에 뒤바꾼 강력한 이미지. 그 주검은 지워지고 잊힌 숱한 희생자 난민들의 시신 더미 위에 떠오른, 우리의 눈앞에 도달한 단 하나의 호소력 있는 이미지였다.
재현 금지된 시신은 대체로 ‘참혹’하다. 사실 우리는 이미 참혹한 시신을 꽤 많이 보았다. 하드코어 공포영화에서, 전쟁영화에서, 역사 스펙터클에서, 그리고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물론 이때의 죽음은 진짜가 아니다. 죽음을 동반한 폭력의 그 거대한 스펙터클은 영화가 거부할 수 없는 시선의 쾌락을 이룬다. 영화는 어디까지나 픽션이니까 괜찮은 걸까?
슈퍼히어로가 지구를 구한답시고 하나의 도시를 초토화시키고 ‘불가피하게’ 막대한 인명피해를 초래해도, 이에 대해 따져 묻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프랑스 평론가 세르주 다네는 절대로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금지된 이미지 영역이 있다고 단언하였다. 그는 아우슈비츠를 다룬 어느 영화를 예로 들어 여주인공이 전기 철조망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장면에서 시신의 손을 가까이 잡기 위해 카메라를 움직인 감독의 결정에 비난을 퍼부었다. 시신을 제대로 보여주려 한 그의 시도를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짓거리로 단언한 것이다. 그의 생각에 아우슈비츠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 그곳의 시신들을 이미지로 재현하는 것은 영화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다네가 이렇게 주장한 이후, 영화에서 유태인 홀로코스트는 재현 불가능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되었다.
라슬로 네메시 감독의 <사울의 아들>은 그 불가침의 성역 안으로 카메라를 들이댄 영화다. 주검을 재현하지 않고 아우슈비츠를 그리는 일이 가능할까?더군다나 주인공은 대량학살에 강제동원된 유태인 부역자로, 시신 이미지는 그를 둘러싼 일상적 배경이다. 네메시는 영리하고 완고한 형식을 택하는 것으로 불가능한 영역에 도전하였다. 말하자면 <사울의 아들>의 카메라는 시종일관 주인공을 따라다니며 그의 뒤통수와 얼굴만 선명하게 잡고, (대량학살의 현장과 시신이 등장하는) 후경은 포커스 아웃된 흐린 이미지로 처리했다. 이건 재현한 것인가, 재현하지 않은 것인가.
예상대로 <사울의 아들>은 논쟁에 휩싸였다. 내가 보기에 <사울의 아들>은 그 ‘천박한 시선’을 경계하며 그것과 거리를 두려 애쓰고 있었다. 세르주 다네의 그 단호한 시선의 윤리는 우리의 무딘 뇌를 각성시켰지만,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이 영화를 반대하는 이들의 그 엄격한 재현 윤리는 왜 아우슈비츠에‘만’ 적용되는가. 왜 그들은 대량학살로 이어진 다른 역사적 비극에 대해서는 그런 엄격한 윤리적 시선을 취하지 않는가.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눈 한국전쟁을 액션영화로 재현해도 무방한 걸까, 제주 4.3 사건에서 무고한 도민들의 시신이 널렸다고 이를 벽장의 옷처럼 전시하는 것은 괜찮은 걸까, 광주항쟁에서 공수부대에 대항하여 시민군이 총을 들었다고 그걸 전쟁영화로 그려도 되는 일일까?세월호가 물속으로 서서히 사라지는 게 너무나 무서워 공포영화를 떠올렸던 나의 천박한 상상력은 또 어찌할 것인가.

강소원 문화평론가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