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그가 끼워진 종족, 실리콘 칼라 노동자. 피곤을 모르고 임금도 필요 없는 기계들이 인간의 노동을 빼앗고 있다” 저명한 사회과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제레미 리프킨이 1995년에 펴낸 문제작, <노동의 종말> 첫 장에서 던진 말이다. 인간의 편의에 의해 발명된 기계가 점점 인간을 능가하게 되고, 인간의 자리를 빼앗고야 말리라는 우울한 예언은 ‘IT 혁명’ 시대에 비로소 나타난 게 아니다. 이미 18세기부터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은 기계를 때려 부쉈으며, 1811년에서 1816년까지의 영국에서는 이 ‘기계에 대한 계급투쟁’이 절정에 달해 ‘러다이트 운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미국의 철학자 랠프 월도 에머슨은 1848년에 쓴 글에서 “기계가 사람에게 안장을 지우고, 사람을 타고 다니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계에 의한 생산력 증대 자체는 좋게 보았던 마르크스도 비용 절감을 위해 자본가들이 기계로 노동자를 대체할 것이라고 내다보았고, 러시아의 문호이자 평화사상가였던 톨스토이도 기계문명이 인류의 발 디딜 곳을 없애버릴 것이라 보았다. 대중문화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인간이 기계의 부속품처럼 전락하는 모습을 담은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스>부터 기계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는 <터미네이터>, 인류를 돕기 위해 창조된 인공지능이 인류를 말살하려 든다는 <어벤저스 2>까지, ‘기계에게 밀려나는 인간’이라는 주제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원초적 공포를 자극해왔다.
그렇다면 이세돌이 알파고에 진 뒤로 온통 떠들썩한 지금의 호들갑은 산업혁명 이후 수백 년 동안 지겹도록 되풀이된, 낡은 놀라움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가만히 보면 기계가 사람을 대체하는 성격이 변화해오고 있다. 러다이트 운동 때는 단지 효율적인 도구 덕분에 더 적은 인원으로 같은 양의 단순 작업을 해내게 된 수준이었다. 그러나 IT 시대에 기계는 단순 작업을 훨씬 넘어 사무노동까지 대체하게 되었고, 인간의 영역은 고도의 사고력과 전문지식을 요구하는 영역으로 좁혀졌다고 여겨졌다. 그러다가 이번 알파고의 승리는 기계가 그런 고급 노동까지도 대체할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변호사도, 의사도, 교수도 가까운 미래에는 ‘피곤을 모르고 임금도 필요 없는’ 존재들이 대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리프킨의 지적은 단지 기술 발달 자체가 인간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을 중심으로 재편성되는 사회체제가 위협적이라는 것이다. 획기적인 비용 절감의 길이 열림에 따라 기업은 고용을 부담스러워하며, 대량 실업과 빈부 격차 확대로 복지국가는 기반을 상실한다. 결국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갈수록 소수의 손에 집중되며, 대다수 사람들은 ‘쓰레기가 되는 삶’으로 내몰리게 된다. 그것은 리프킨과 비슷한 시점에 발표된 커크패트릭 세일의 <뉴 러다이트 운동의 필요성>에서도 엄중히 경고된다. “성장과 생산량, 속도와 참신함, 힘과 조작 가능성을 중시하는 것이 근본적인 산업주의 정신이다. ··· 그것이 창출하는 변화는 순수하게 물질적이며, 기본적으로 소수 이익의 극대화를 오로지 추구한다. ··· 그리하여 사람은 생존의 기본 요소들, 즉 대지와 공기, 참된 먹을거리와 집, 친밀한 공동체와 가족 등을 어느 사이에 상실하고는, 물 밖으로 던져진 물고기나 덫에 걸린 늑대 꼴이 된다”.
호들갑은 호들갑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마르크스이든, 리프킨이든, 세일이든 저마다 아주 가까운 미래에 기계에 의한 디스토피아가 펼쳐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렇게 안 되지 않았는가? 새로운 기술이 낡은 일자리를 없애버렸지만, 새로운 일자리 또한 창출하지 않았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럴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더 이상 과거처럼 변통이 되지 않는 ‘특이점’이 임박했는지도, 어쩌면 이미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반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기계가 사람의 일을 대신한다면, 이제까지처럼 일에 쓸모가 있느냐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면 된다. 그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기게끔, 가치관과 사회제도가 바뀌어가야 한다. 그러면 기계가 인간을 대신한 것이 오히려 축복이 될 수도 있으리라. 정말 큰 문제는, 그 시점에 과연 무엇을(‘누구를’이 아니다) 인간이라고 부를 것이냐이다. 

함규진
서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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