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경남 양산의 한 병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께서 별세했다. 지난 20일 또 한분의 피해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올해를 맞이하며 생존해 계신 피해자 할머니 수는 46이었지만 어느새 45로, 44로 움직였다. 남아 계신 피해자 할머니들의 수가 마치 슬픈 종소리까지의 카운트다운처럼 느껴진다.
취재를 위해 찾아간 수요시위 현장에는 최근 돌아가신 할머니를 위해 분향소가 설치됐다. 분향소에 붙은 양초며 향을 올리는 것은 그를 잊지 않고 애도하자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마음이었다. 하지만 분향소가 처음 설치될 때 사람들의 마음을 제지하고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경찰이 분향소의 철거를 ‘혐오 시설’이라는 이유로 철거를 요구한 것이다. 말문이 막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8월, 광복 70주년을 맞아 수요시위를 하던 독립운동가의 후손 최현열 씨가 분신했다. 그가 몸에 불을 지른 이유는 역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해서였다. 그 이후 유가족이 분향소 설치를 위해 수요시위 현장에 찾아갔지만 경찰의 제지를 받아야했다. 그 때는 ‘<도로법>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길가에 놓는 분향소조차 <도로법> 위반이 돼버렸다.
피해자 할머니들 중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리다가 그 기다림이 한 평생이 되어 떠나신 분이 벌써 194분이다. 기네스북에도 등록된 24년 동안 1,219차의 최장 시위에 함께한 시민들, 분신한 독립운동가의 후손. 이들의 죽음과 노력이 아무런 의미가 아니라는 듯 버젓이 12월 28일의 한일 합의안에 ‘불가역적’이라는 말로 박아둔 것 같다. 말 그대로 ‘죽어도’ 듣지 않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는 우리 사회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죽어도 듣지 않는 사회는 문제가 있지 않은가. 전체주의 사회의 논리와 같게 개인의 죽음이 국가와는 별개의 문제라는 생각하여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단순히 역사의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되어야 하는 문제가 바로 여기 있다.
하지만 국가의 수법은 더욱 교묘해져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하려 들고 있다. 새 학기부터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배울 국정 역사교과서에는 ‘위안부’와 ‘성노예’라는 용어와 사진이 배제됐다. 한일 위안부 합의에 소녀상 이전을 약속한 것도 같은 경위에 서있다. 구심점 역할을 하는 소녀상이 이전한다는 것은 골칫덩이를 치워놓겠다는 것이다. 한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의 말이 있다. 침묵은 가해자를 지켜줄 뿐 피해자를 지켜주지 않는다. 그를 넘어 침묵은 미래의 피해자도 만들어낸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청년세대들이 가장 앞서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고 있는 점이다. 슬픈 종소리에 가까워지기까지 카운트는 아직 남아있다. 죽음이라는 침묵으로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사회가 되기 전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기억하자, 마음에 담아두자, 침묵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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