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기획 시리즈] ② 대만 속 한국 독립운동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은 지 70년이 흘렀다. 신채호 선생과 조명하 의사는 대만 땅에서 일제의 시선을 피해가며 대한 독립을 위해 활동하다 체포됐다. 이후 각각 중국 여순 감옥과 대만 타이중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부대신문>은 지난달 19일부터 21일까지 대만 타이베이와 타이중 등지에서, 대한 독립의 의지를 품고 대만으로 향했던 이들의 흔적을 따라가 봤다.

 
   

1. 기륭항

 대만의 대표적인 항구로 북쪽 지역에 위치한 기륭항. 무역항이자 관광지인 기륭항은 조선인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곳이다. 신채호 선생을 비롯한 조선인들이 대만 땅을 밟기 위해 거쳐 간 곳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대만은 일제의 통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 때문에 대한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조선인들은 대만을 거쳐 항일운동을 이어가고자 했다. 조명하 의사도 상하이 임시정부로 향하기 위해 대만에서 잠시 머물고 있던 중 타이중에서 의거를 일으켰다

2. 기륭우체국

 기륭항 선착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평범한 외관의 기륭우체국이 있다. 이곳은 신채호 선생이 기륭을 방문했던 1928년 5월에도 마찬가지로 우체국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는 독립투쟁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기륭을 찾았다. 위조한 외국환을 현금화해 사용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기륭우체국에서 그 계획을 실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만 당국은 신채호 선생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대만 경찰은 그를 미행하다 우체국에서 체포했다. 신채호 선생의 의지가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우체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기륭수상경찰서(현재 기륭항무경찰국)로 압송돼 심문을 당했다.

3. 합작금고 타이중 지점

조명하 의사는 대만의 중서부 도시 타이중의 도서관(현재 합작금고 타이중 지점, 사진 속 붉은 외벽의 건물) 근방에서 의거를 일으켰다. 그가 독을 바른 단검을 들고 인파 사이에 서있던 1928년 5월, 당시 일왕의 장인이었던 구니노미야 구니요시가 탄 지붕 없는 차가 도서관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차가 도서관 앞 사거리 지점에서 좌회전하려는 순간, 조명하 의사는 차 뒤편으로 올라 구니노미야에게 단검을 던졌다. 구니노미야는 그 상처로 1929년 1월에 죽었다. 조명사 의사는 현장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일본 군경들에 의해 타이중 경찰서로 압송됐다.

4. 타이베이 형무소 옛터

타이베이 시내 한가운데, 높은 건물들 사이로 덩그러니 세워진 낡은 벽은 과거 타이베이 형무소의 담장이다. 일제는 항일 운동 인사를 이 형무소에 수감했다. 조명하 의사도 1928년 6월 14일, 타이중 의거로 이곳의 독방에 수감됐다. 그는 같은 해 7월 17일 타이베이 고등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10월 10일 사형 집행까지 생의 마지막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형이 집행되기 전, 할 말이 없느냐는 질문에 “나는 삼한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하리라”는 말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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