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남들의 세계사>의 이기호 작가

 

   
 지난달 19일 광주대학교에서 이기호 작가를 만났다

1980년대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장남’은 물러났지만, 여전히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배중인 그 시대의 ‘차남’이 있다. 도로교통법을 국가보안법보다 더 무겁게 여겼던,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려다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의 공범이 돼버린 택시기사 ‘나복만’이다. 이기호 작가는 소설 <차남들의 세계사>를 통해, 애인 김순희와 지낼 방 한 칸을 일구어낸 것에 만족하던 나복만의 삶이 군사정권 아래서 무너지는 모습을 그려냈다. 지난달 19일, 장남의 군홧발이 만든 상처가 아물지 않은 5월의 광주에서 이기호 작가를 만났다.

△‘자, 이것을 누워서 한번 들어 보아라’는 등 독자들에게 특정한 자세를 요구하는 메시지로 이야기를 연다
처음엔 거의 장난으로 시작했다가,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 장치로 쓰자’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 함께 참여하고, 이 소설이 단순한 읽을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환기시켜주는 것이다. 그러다가 점차 스스로를 환기시키기 위해 쓰고 있다고 느끼게 됐다. 소설 속의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야기 자체가 우울하고 심각한데, 그렇게 되면 작가도 사람이다 보니 감정적인 접근을 하게 될 수밖에 없다. 감정적인 접근은 사건이 흐려지게 만든다. 그럴 때 좀 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이 상황을 바라보게 만드는 일종의 주문 같은 역할을 하게 되더라.

△김순희를 그리는 장면에서는 다른 장면들과 달리 ‘들어 보아라’ 가 아닌, ‘읽어 보아라’ 라고 하기 이야기한다
소설은 스토리를 통해서도 전개되지만, 작가는 스토리와 관계가 먼 지점에서 감정의 결을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독자는 감정을 이입하고 상황을 능동적으로 상상하게 된다. 나복만이나 그 외에 인물들은 스토리 위주로 그린 반면에, 김순희 같은 경우에는 그녀의 감정이 어떻게 흘렀을까가 굉장히 궁금했고, 그것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김순희라는 캐릭터가 가장 마음 아팠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적이고 폭력적인 부분과 함께, 이야기의 또 다른 핵심을 이뤘던 것이 사랑이다. 이 사랑의 서사를 만들어낸 것이 김순희였는데, 사랑으로 인해 혼란 속에 빠진 것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김순희의 편지 장면에서는 독자들이 편하게 듣지 말고, 좀 더 오랜 시간을 머물며 읽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침묵들과,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감정들을 좀 더 느끼길 바랐다.

△나복만이 마지막에 택한 행동은 정 과장과 함께 차에 치임으로써 거짓 진술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초고의 결말은 나복만이 자살하는 것이었다. 문맹, 택시기사로 살아온 그가 갑자기 민주적인 각성을 하는 등 돌발적인 행동을 하면 소설이 작위적으로 변할 것 같아서다. 그렇게 하고 났더니 너무 허무했다. 현실에서 사람의 성격은 잘 안 변하는데, 소설마저 그렇게 돼선 안 될 것 같았다. 소설이라면, 시작과 끝에서 나복만의 변화를 보여줌으로써 이 세계나 인간을 긍정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에게 갑작스런 변화가 생길 수는 없지만, 이 세계가 굉장히 폭력적인 구도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최대의 방법이었던 것 같다.
또 용산 사태나 세월호 사건 등 비극적인 일들을 바라보며 패배주의적이고, 허무한 느낌이 들었는데, 소설까지도 그렇게 돼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더불어서 의도했던 것은 나복만을 돌아오지 않고 수배중인 상태로 만든 것이다. 그에게는 이 시대가, 여전히 80년대의 상황과 달라지지 않았기에 돌아오지 않는 지점으로 만들고자 했다.

△주인공 나복만 뿐만 아니라, 소설 속 많은 인물들이 그 시대의 ‘차남’으로 등장한다. 심지어 나복만을 고문하던 요원들도. 이들 모두가 시대의 피해자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나
그 사람들의 죄나 잘못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도적, 구조적 배경처럼 더 큰 연원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차남과 같은 역할에 놓여있다고 생각했다. 독재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했던 사람도 대부분이 평범하고 나복만 같은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지나간 시대의 사람들 보다 민주의식이나, 표현과 인권의 문제에 있어서 조금 더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회에 파시즘이 밀어닥쳤을 때는, 우리도 그런 존재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 같다. 그게 사실 제일 두려운 모습이다.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문제 안에서 한 인간은 언제든지 그런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들이 컸다.

△과거의 대학생은 국가 폭력에 저항하는 민주화의 장면에서 여러 차례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최근에는 시대와 학생사회의 변화와 함께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소설을 통해 대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요즘 대학생은 사회 문제나 타인에 대해서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려온다. 사실 그것도 대학생들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시대적, 구조적인 문제가 작동했기 때문이고 그런 상황들을 만들어낸 것은 기성세대들이다. 그래서 기성세대들이 대학생들에게 그런 지적을 하는 것은 비겁한 일인 것 같다.
물론 우리 사회와 민주적 절차에 대한 문제도 중요하다. 그런 것들의 참다운 시작은, 주변 사람들에 대한 공감능력의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민주운동을 했던 사람들 중 일부가 실패한 것은 주변의 모습을 돌아보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거대 사회의 민주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헌신했으나, 자기 삶의 영역에서의 민주적인 혁명이나 혁신은 이루지 못했다. 대사회적인 민주나 공감문제는 얘기하면서, 정작 자기 가족이나 이웃에 대한 공감은 현저하게 떨어졌던 것이다. 이런 기성세대들의 우를, 젊은 친구들은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사실 문학작품은 쓸모없지만, 유일하게 쓸모 있는 효용 중 하나는 공감능력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하고, 만나보지 못했던 사람들의 아픔에 눈물도 흘리며 공감능력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대학생들이 모든 것에 있어서 경쟁의 구도로 내몰려, 타인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 상상하거나 추측할 수 없게 됐다. 다들 바쁘겠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타인에 대해서 고민하고 생각하고 있나’에 대해 성찰해봤으면 한다.

   
 <처남들의 세계사>
이기호 저/2014/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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