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획기적인 발전에 보탤 수 있는 게 없지. 누군가 밑그림을 그린 설계도를 따라 개선될 일은 많겠지만 그런 건 행동 대장들이 할 일이지. 참 완벽하고 시시한 세상이지 않니?

 - <표백> 중

 단숨에 다 읽을 수 있었지만 의식적으로 끊어 읽을 수밖에 없었다. 한없이 공감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 치솟는 반발심을 억누르기 위해 애써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힘든 책이었다.

  여느 어른들처럼 살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나름의 굳은 신념을 지켜내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지난한 수험생활이 끝났다는 해방감을 만끽한 후 마주한 내 모습은 상상하던 모습과 달라 꽤나, 자주, 우울했다. 

  소설의 등장인물들도 필자와 비슷하게 살아가는 젊은이들이다. 주인공 ‘나’는 서울의 중하위권 대학에 다니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이 시대 청년의 전형이다. 그는 외모, 성적, 성격 어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여대생 ‘세연’을 만나게 되고, 그녀의 친구인 ‘추’, ‘휘영’, ‘병권’과 어울려 다닌다. 세연은 청년들을 꿈꾸지 못하게 하는 사회를 비판하며 자살을 선동한다. 자살만이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유일한 저항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실제로 자살했고, 추와 병권까지 자살함으로써 목표를 이루는 듯 했다.

   
 

  세연이 말하는 흰색 세상은 더 이상 발전할 것이 없는 ‘완성된 사회’다. 이러한 사회에서 청년들이 가지는 이상은 옷에 묻은 얼룩과도 같다. 표백제로 옷의 얼룩을 제거하듯, 이 세상에서 이상적인 생각은 무의미한 것이므로 표백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 세연의 주장이다. 소설은 구조적 변동의 가능성이 없는 사회 속에서 힘없는 청춘이 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을 통한 저항뿐이라 말한다. 절망적이지만 명쾌하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위로하는 것보다 ‘너희가 힘든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라고 진단해 주는 것이 훨씬 속 시원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동의할 수는 없었다. 세연이 자살 선언을 하는 원인에 대해서는 백번천번 공감할 수 있으나, 자살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자살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해야 할까?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공감과 반감을 동시에 느껴야 했던 것 같다. 순백색으로 도배된 사회에서 더 이상의 변화 가능성을 찾지 못한 채 ‘표백’되어 가는 세대, 우리. 세연의 자살 선언에 공감할 수밖에 없어 슬픈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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