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도 ‘나오시는’ 시대, 기업은 고객을 모셔야 한다. 소비자야말로 경제활동의 종착점이자 생산자극의 근본이니, 유난이라 할 수 없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정치인은 유권자의 투표용지를 투자받아 입지를 굳힌다. 그들은 선거만 되면 고객 모시기에 급급하다. 큰절하며 스스로가 ‘을’임을 증명하고, 드넓은 광장에 홀로 서서 당의 혁신을 말한다. ‘갑’인 선거인에게 무릎꿇고 ‘믿어 달라’ 외친다. 선거인과 피선거인의 단순관계만을 봤을 때,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장면이다. 허나 그 때 뿐이다. 선거 전에 남발하던 그들의 이상적인 공약은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비난의 활에는 침묵을 방패삼는다. 일만 생겼다하면 날치기를 서슴치 않는다. 그들이 바닥낸 세수는 우리의 혈세로 채워 넣는다. ‘소비자를 위한 단말기통신법’에서 소비자는 기업으로 둔갑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연기한다. 우리는 가면에 속아 속절없이 단물만 빨아 먹히고 있다.

소방관에게 호통 친 것으로 유명한 정치인의 대학 강연이 화제가 됐다. ‘한국정치론’이라는 강의명답게 그의 정치관을 고스란히 드러낸 강연이었다. 대선 후보로까지 거론되던 해당 정치인은 학생들의 반발에도 꿋꿋이 자신의 신념을 주장해나갔다. 여당 보수혁신특별위원장다운 태도였다. “동문에 대해서 그렇게 비판적으로 보시면 굉장히 문제가 있다” 따위의 말로 우리사회의 고질적인 학연·지연 문제를 몸소 증명했음은 물론 “그 지성은 가짜 지성”이라며 대통령의 방패 역할을 자처했다. “여성 대통령”을 반복 언급하며 신화화하는 그의 모습은, 대통령과 대선 후보를 다툴 때 “‘불통령’이 될 것이고 ‘먹통령’이 될 것”이라 비판하던 모습과는 상반된다.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갈 때 다르다더니, 그의 돌변하는 태도는 이 시대 정치인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본질 흐리기도 계속되고 있다. 국회에서 오간 ‘여야 싸움으로 몰아야’한다는 쪽지가 대표적이다, 건전하지 못한 대립을 유도하며 다툼이 만들어낸 모래장막이 시야를 어둡게 한다. 갑과 을이 전도된 아이러니를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 상황에서 고객‘님’의 경어반복은 위선에 가깝다. 상냥하게 고개 숙이지만 속내는 다르다. 위임받은 권리에 갑이 된 것 마냥 유세 부린다. 권리는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한다. 투표용지를 담보삼아 판돈을 부풀리는 데 혈안이다. 을이 된 우리는 먹이사슬에서 낙하했다.

우리도 ‘차별에 찬성’하고 있다. 얼마 전 한 국회의원이 발의했다는 법안이 순식간에‘ 미친 법’이라 명명됐다. 이주아동에게 더욱 많은 복지혜택을 부여하자는 내용이었다. 해당 의원이

발의한 것이 아니라 밝혀졌지만 그 파장은 대단했다. 대대적인 반대 서명이 시작됐고, SNS에서는 비판적인 코멘트와 함께 뉴스 공유가 계속됐다. 자격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마치 불법 체류가 그저 죄악이고 민폐라는 논리. 부모의 신분에 상관없이 아동의 체류권, 교육권, 보호권을 보장하는 우리나라지만 예외는 있나보다, ‘파이’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노력, 더한 약자를 때려잡는 투쟁은 계속된다. 외국인 노동자가 체불임금 지급 진정을 넣었다가 공무원의 신고유도로 추방될 처지에 놓였던 것이 얼마 전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무감해졌을까. 갑과 을이 뒤바뀌어 새장 속 싸움만이 반복되는, 여러모로 씁쓸한 오늘이다.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