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지난 지면 인물
차별에 찬성하는 사회, 20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인터뷰]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저자 오찬호(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 이광영 기자
  • 승인 2014.03.10 12:42
  • 호수 1477
  • 댓글 0
     
생각했던 이미지와 전혀 달랐다. 지난해 발간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저자 오찬호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은, 직설적인 문체와는 달리 부드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이라는 단어로 20대에게 ‘직격탄’을 날린 오찬호 연구원. 그의 책에는 출신 대학이 명시돼있지 않다. 그는 학력위계주의의 소재가 되는 것이 싫었고, 출신 대학을 밝히기 꺼려했다.
   
 

20대를 주목하기 전까지

신부가 되기를 꿈꿨던 그는 신학을 전공했다. 신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흥미를 느꼈지만 종교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그는 “사회학으로 가장 분석하기 좋은 학문이 신학”이라고 말한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계발을 해야 한다’와 같은 종교적 주술에 갇혀있는 현상을 하나의 메카니즘으로 파악하는데 있어 신학 공부는 큰 도움이 됐다.

종교에 회의를 느끼면서부터 자연스레 사회학을 접하기 시작했다. 복수전공 제도를 통해 사회학을 공부하던 그는 교수의 추천을 받아 대학원에 응시하게 됐다. 대학원을 다니던 그는 생활비 확보를 위해 매일 새벽 신문배달을 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노동’에 대한 로맨틱한 해석, 이를테면 ‘성장의 밑거름’이라 말하는 것들에 커다란 반감이 들기 시작했다. ‘노동이 사람을 좀먹는구나, 현실이란 이런 거구나.’ 그는 신문배달을 하느라 하지 못했던 일들에 대해 아직도 안타까워하고 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날로 정규직 되려고 하면 안 되잖아요!” 한 경영학과 학생이 던진 한 마디가 계기가 됐다. ‘KTX 여승무원 정규직 전환’ 문제로 토론을 진행하던 오찬호 연구원은,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과 생각지도 못했던 주위의 동조를 목격한 후 대학생들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이 연구의 결과물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이다. 이 책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대중적 글쓰기’로 풀어낸 책이다. 그는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많은 20대를 접했다. 이를 통해 ‘차별과 배제의 법칙을 내면화한’ 20대의 실체와 마주할 수 있었다. 오찬호 연구원은 이 책에서 20대들이 왜 ‘차별에 찬성하게 됐는지’에 대해 분석했다. 책에 나타난 20대의 현실은 열악하기만 하다. 학비와 생활비에 대한 부담, 취업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 늘어나는 현실, 이를 모두 갖춰도 취업하기는 힘든 20대. 오 연구원은 이들을 ‘사회적 약자’라 생각했다. 당연스레 다른 약자들에 대해서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20대들은 그 누구보다도 차별에 찬성했다.

오 연구원은 이러한 차별의 모습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을 ‘학력위계주의’라 지적한다. 기존의 학벌·학연주의와는 결이 다르다. 학력위계주의 내에서 20대들은 수능 점수에 따라 사람의 순위를 노골적으로 책정하고 내면화한다. 수능 점수가 사람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진리가 돼버린다. 20대에게 이러한 평가방식은 ‘당연’하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힐링서를 포함한 자기계발서 열풍도 맥락을 같이 한다. 20대들은 사회적·경제적 성공 여부를 자기계발의 양과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능력주의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스스로 노력하면 능력을 얻게 되고, 이에 따라 차등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공정성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이다. 노동도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사회는 공정성이 전혀 보장돼있지 않다. ‘모두가 같은 조건이다’는 말은 거짓이다. 목표는 같아도 출발선은 다르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누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20대는 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괴물의 가면을 쓰고 있다.

차별에 찬성하는 20대를 위해

△20대를 주목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책의 내용과 같다. 당연하다고 생각됐던 ‘사회적 약자’끼리의 동병상련이 20대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충격을 받은 후 이러한 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기 시작했다.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진행하다보니 이들을 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힘들어하는 그들의 모습은 이들을 자각하고 성찰할 필요가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의 삐딱함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존재라고나 할까.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이라는 부제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20대가 있을 것 같은데

특정한 사람보다는 어떤 사회를 살고 있는가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가장 괴물이 된 20대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이 세상이 악랄하게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그런 마음. 출판사에서 실시했던 20대 대상 모니터에서 ‘모욕감을 느꼈다’라는 평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 속에도 20대의 모습이 들어있다고 생각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이를 부정하는 목소리가 많겠지만, 결국 ‘파이’의 문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닌, 그런 사람들의 비중이 늘어났다는 것이 중요하다.

△20대들에게서 어떤 반응을 원했는가

억울하다, 부당하다,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하나. 이런 것들? 예전에는 같은 20대의 세월을 겪으면서도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환경이었는데, 지금 우리는 스마트폰만 손에 들고 있지, 사실상 정보를 차단시켜야만 성공할 수 있는 사회에 있다. 이에 대해 20대들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길 원했다.

△어떤 반응이 가장 인상적이었나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책에 관한 리뷰가 올라온 적이 있다. 책에 대해 설명을 해놓은 리뷰였는데, 댓글에 굉장히 인상적인 댓글이 달려 있었다. ‘뻔한 이야기인데, 볼 필요가 있나’라는. 의도했던 바와 일치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접근방식만 새로울 뿐,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20대들을 독려, 위로하거나 불쌍함의 개념으로만 접근을 했다면 나는 이를 넘어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가해자가 되버린 20대’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20대만의 담론은 아닌 것 같다

정확한 지적이다. 사회가 얼마나 잘못됐는가를 가장 여린 친구들이 상처받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어떤 사회를 자정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환기시켜주고 싶었다. 기성세대도 마찬가지의 상황에 있지만, 그들은 경험과 노련미로 희생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20대는 그런 구조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사회구조의 모순을 사회 구성원 모두가 느끼길 원했다.

△앞으로 사회가 어떻게 될 것이라 생각하나

이미 이런 현상들이 10대들의 교육 현장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특목고 학생들이 ‘특목고를 간 학생’이 아니라, 인문계 학생들이 ‘특목고를 못 간 학생’이 돼버렸다. 이러한 상실감으로 기본적인 목표도 낮아지게 되고, 학력위계주의가 만연해져 일상에 녹아들 것이다. 특히 지금처럼 자기계발 진단들로만 넘쳐난다면 사태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대안이 있는지

우리 사회는 대안 중독증에 걸린 것 같다. 따로 생각해본 대안은 없다. 이에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더라. 협동조합이나 대안마을, 대안학교 등 현대사회의 수많은 ‘대안’들은 ‘답답하면 ○○하면 되잖아’ 식의 논리를 파생시킨다. 이는 사회학적으로 피해야 하는 논리다. 전체의 틀 안에서 희생당하는 삶을 줄이는 것이 목표인데, 특수한 ‘대안’으로의 도피는 사회적인 책임회피와 마찬가지다. 대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조금씩이나마 여론이 형성돼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냐는 물음에 어떤 말을 하더라도 거짓이 된다. 잘 바뀌지 않으니까. 중요한 것은 주어진 제도, 기득권 혹은 상황에 대해 거부하거나 비판적으로 대하는 일련의 무리들에 대해 ‘린치’를 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지지하지 않더라도 농담으로나마 비아냥거려서도 안 된다. 비아냥거림이 시작되면 담론 자체가 약해져버린다. 자신과 생각이다를 뿐이니, 평가절하 하지 말고 그냥 놔두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두면 논리에 설득당하는 사람이 생기고, 논리가 보강되며, 더 커다란 여론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

지식은 사물을 판단하는 정보의 총량이다. 이 총량이 커야만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다. ‘비아냥거림’은 이러한 정보를 사전에 차단해버린다.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는 어떤 요구를 하려해도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최소한의 수요조차 확보되지 않아 이를 요구할 수 없게 된다. 정보 확산을 차단시키는 사회는 이미 공정하지 못하다.

이광영 기자  code0maize@pusan.ac.kr

<저작권자 © 부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광영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