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리저렉션편까지 만들어진 영화 ‘매트릭스’(1999년 개봉) 1편에서 주인공 네오는 행복한 가상 현실을 유지하게 해주는 ‘파란 약’과 고통스럽지만 진짜 현실을 직면하는 ‘빨간 약’ 중 후자를 선택합니다. ‘빨간 약’을 먹은 네오는 자신이 그동안 기계에 의해 사육당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새로운 길에 나서게 됩니다.

비장애인으로 43년, 기자로 16년간 살았던 제가 비자발적으로 ‘빨간 약’을 먹게 된 순간은 2020년 여름이었습니다. 2015년 처음 혈액암이 발병한 이후 두 번의 재발을 극복하고 기적적으로 4년 만에 회사에 복귀한 지 1년 뒤 갑작스러운 급성중이염으로 청력을 잃었습니다. 저는 법적으로 ‘중증장애인’이 되었습니다(현재는 인공와우 수술과 청력 보조 기구를 통해 정상 청력의 70% 회복한 상황).

청력을 잃은 후 제가 마주한 한국 사회는 네오가 기계가 지배하는 현실을 직시하며 느꼈던 당혹감 이상을 선사했습니다. 금융거래 중 ARS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숫자를 입력해야 하는 시스템, 모든 문의 사항은 전화로만 접수하는 구조, 소리로만 위험 신호를 알리는 화재경보기 등 당연하다는 듯 소리를 듣는 사람을 기본으로 설계된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마치 ‘장애가 있는 너는 이 사회에 속해있지 않아’라는 선고를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생과 사를 오가던 4년 간의 혈액암 투병 기간에 느꼈던 두려움보다 이 기간에 느꼈던 상실감이 오히려 저를 더 힘들게 했습니다.

이런 절망의 바다에서 저를 구원해 준 건 장애에 무심했던 우리 사회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던 선배 장애인들의 발자취였습니다. ‘장애의 역사’를 통해 미국 장애인 운동의 역사를 ‘실격자들을 위한 변론’, ‘반짝이는 박수 소리’ 등을 읽고 장애 당사자의 당당한 마음가짐을 배웠습니다. 비장애인도 편하게 이용하는 지하철의 엘리베어터, 저상버스 등 각종 교통 약자 편의시설 역시 바로 이들의 노력 덕분에 빨리 도입됐고 방송국 메인 뉴스 하단에 얼마 전부터 나오기 시작한 수어 통역 역시 장애인 단체의 지속된 노력의 결과였다는 미처 몰랐던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기자로 활동하며 사회의 많은 문제를 비판하면서도 장애인의 날에만 잠깐 관심을 기울였던 저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겪었던 질병과 장애에 대한 불합리한 시선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데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발암야구’, ‘암 걸리겠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보게 되면 ‘갑분싸’를 감수하고 다른 표현을 써달라고 망설이지 않고 말했습니다. 또 ‘절름발이 정책’, ‘정신병자’처럼 장애나 질병을 폄하하는 표현을 쓰지 말아 달라는 내용을 담아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순간의 어색함과 ‘뭔데 당신이 나를 가르치냐’는 핀잔이 무서워 그 순간을 외면한다면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제 마음의 변화는 인생의 항로도 바꿨습니다. 저는 지난해 18년 간의 기자 생활을 끝내고 메신저와 디지털플랫폼 기업의 ‘인권과 기술윤리팀’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온 국민이 쓰는 서비스에 장애인의 접근성을 확대하고 질병과 장애에 대한 혐오 표현에 적극적인 대응책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제 마음을 크게 움직였습니다.

질병과 장애는 당사자이거나 가까운 사람이 겪고 있지 않으면 그 상실감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아픔을 공감해달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질병과 장애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폭이 커진다면 환자와 장애인이 겪을 상실감은 줄어들 겁니다. 그 변화는 여러분의 작은 관심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황승택 작가·카카오 인권과 기술윤리팀 부장
황승택 작가·카카오 인권과 기술윤리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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