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권. 특권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고위 관직의 자녀라고 하여 허위 스펙으로 장학생에 오른다거나, 부모가 교직원인 신분을 이용해 그들만의 교육 사다리를 놓는 그런 행위들이 떠오르는가? 물론, 누군가는 이 두 행위를 두고 특권이라 말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불가능한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능하니까.

하지만, 우리는 다른 의미의 특권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권리가 아닌, 우리가 누리고 있는 권리에 대하여. 특권이 특별한 권리를 의미하는 말이기는 하나, 실은 그리 거창한 말이 아니다. 약속 시간에 늦었을 때, 두 다리로 열심히 뛰어다닐 수 있다면 이것도 하나의 특권이며 친구에게 두 손가락으로 “나 늦을 거 같아”라는 문자를 전송할 수 있다면 이것도 특권인 것이다.

즉, 특권이란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권리다.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특권을 가진 자의 여유로서,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로 정의하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특권은 특정 상황이 아닌 일상적으로 누리고 있는 권리며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조건이기 때문에 대다수 사람은 그들의 특권을 눈치채지 못한다.

필자도 특권을 실감한 때가 있다. 바로 지난해 5월에 진행했던 '부산대학교 부산캠퍼스 내 배리어프리(배리어 현황)' 취재다. 지난해 4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시위가 언론이며 SNS며 화두로 올랐고, 마침 <채널PNU>에도 하나의 제보가 들어와 곧바로 취재에 들어갔다. 대학 내 장애 지원센터를 지속적으로 방문했고, 청년의 시각으로 한계를 느낀 부분에서는 사회적 협동조합 '이유'와 부산 장애인총연합회에 도움을 구하기도 했다. 취재 결과, 캠퍼스 내 총 137곳의 방해 요소가 장애 학우들의 이동에 많은 제약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만 그들의 고충을 이해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불편한지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직접 전동 휠체어를 타고 장애 학우들의 등굣길을 이동할 것을 결심했다.

휠체어를 타며 마주했던 배리어 중 문창회관에서 새벽벌도서관으로 향하는 우측 인도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시, 장애지원센터에서 지원받았던 전동 휠체어에는 휠체어가 뒤로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지대 역할을 하는 보조 바퀴가 달려 있었다. 인도에는 높이 차가 심한 단차가 있었는데 보조 바퀴가 그 단차에 걸려 꼼짝달싹 못 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부닥쳤다. 이후, 그 인도로 다시 내려가야 했을 때에는 아예 인도에 올라가지 못하고 차도로 내몰렸다. 그 순간, 멀쩡한 두 발로 캠퍼스를 누빌 때는 느끼지 못했던 ‘나의 특권’이 몸소 느껴졌다. 필자가 아무 생각 없이 누리던 특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권리였음을 깨달은 것이다.

지난 1월 30일 오세훈 서울시장이 장애인 권리 예산 등을 요구하며 지하철 승하차 시위를 이어온 전장연에 “장애인분들이 약자인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더 이상 지하철 지연을 수반하는 그런 형태의 시위는 더는 용인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지하철 시위에 대한 논란이 다시 한번 일었다. 우리는 특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출근길 시위라고 해서 시위 그 자체의 목적을 간과해선 안 되며 시위 방식에 대해서도 불만을 높여선 안 된다.

지금껏 우리는 우리가 가지지 못한 특권에 대해서만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며 항의하고 분노했다. 하지만, 이제는 반대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특권에 목매고 있는 그들의 운동장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김현희 영문뉴스팀 기자
김현희 영문뉴스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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