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기림비 이전 제막식 열려
-한국 근현대사의 대표적 민족 사상가
-부대신문 초대 주간 역임 등 후학 양성

일제강점기부터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한평생 우리 사회에 필요한 목소리를 내며 우리 대학에서 수많은 후학을 길러낸 고(故) 이종률 교수를 기리는 행사가 열렸다.

산수 이종률 교수의 탄생 100주년 기림비에 헌화하는 모습. [심세희 기자]
산수 이종률 교수의 탄생 100주년 기림비에 헌화하는 모습. [심세희 기자]
제막식 기념사를 하는 차정인 총장. [심세희 기자]
제막식 기념사를 하는 차정인 총장. [심세희 기자]
제막식을 진행하는 모습 [홍보실 제공]
제막식을 진행하는 모습. [홍보실 제공]

우리 대학은 지난 11월 25일 ‘이종률 교수 탄생 100주년 기림비 이전 제막식’을 열었다. 기림비는 2005년 이종률 교수(1905~1989)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 교수가 재직했던 우리 대학 교정에 세워진 기념 표석이다. 이번 제막식은 기존 교내 10.16 기념관 앞에 있던 기림비를 교내 민주화 기념장소로 재단장한 민주 언덕으로 이전하면서 개최됐다.

제막식은 우리 대학과 △산수이종률선생기념사업회 △우리 대학 민주동문회 주관으로 개최돼 회고사와 추모사 등으로 구성됐다. 이날 △차정인 총장 △산수이종률선생기념사업회 하일민 회장 △우리 대학 민주동문회 △민족광장 배다지 상임의장 △송기인 신부 등 약 50명이 참석해 이 교수의 발자취를 기렸다.

이종률 교수는 일제강점기부터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진보적 발전에 일생을 바친 근현대사의 대표적인 민족 사상가다. 이 교수는 민족건양(民族建揚)·민족자주국가를 주창하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투신, 해방 이후에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분단 이후에는 자주통일운동과 민주 민족운동을 펼쳤다.

독립투사 이 교수는 일제강점기 시기 ‘민중 본위, 민족 본위의 사회 과학 연구’를 내건 최초의 사회과학 연구 학생 단체 공학회(共學會) 창립을 주도했다. 또한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재일본 조선유학학우회, 조선인 단체 협의회, 신간회 도쿄지회에서 활동하며 압제에 항거했다.

해방 이후 이 교수는 통일 운동과 민주화 운동에도 힘썼다. 1946년 공학회(共學會)의 창립을 주도하여 좌우의 대립 격화를 막고 변혁 운동을 준비했다. 1953년에는 우리 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부임해 학내 언론 ‘부대신문’의 초대 주간 교수로 취임하는 등 후학들을 길러 냈다. 이어 ‘국제신보’ ‘부산일보’ ‘영남일보’의 논설위원을 역임하며 언론 활동에도 주력했다.

1961년에는 ‘민족일보’ 창간을 주도하고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를 창립했으며 그해 5⋅16 군사정변 이후 민족일보 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약 5년간의 옥살이 끝에 1965년 석방된 이 교수는 1989년 별세할 때까지 부산 지역에서 전개된 민주화 운동의 큰 축으로 우뚝 섰다. 우리 대학 학생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며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했다.

이날 제막식에 참석한 이종률 교수의 아들 이우눌 씨는 “아버님의 기림비 이전을 도우신 차정인 총장님을 비롯해 기념사업회 회원 여러분들, 부산대 민주동문회 관계자분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기념사를 맡은 차정인 총장은 “산수 이종률 선생님의 지고지순한 삶과 사상과 학문이 유방백세(流芳百世)로 남아, 부산대학교와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밝혀가는 등불로서 큰 자산이 되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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