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종군기자 김상훈

 

△처음 사진을 찍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나요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기 시작한 건 고3 때부터예요. 사람들이 서울 시내를 뛰어다니고, 최루탄이 날아다니는게 신기해서 시위 현장을 찍기 시작했어요. 또 어렸을 때부터 무기에 관심이 많았는데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기가 실제로 사용되는 모습을 자료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시위 현장을 찍고 난 다음 뉴스를 보면 제가 찍었던 현장이 나왔죠. 뉴스를 보면서‘아~이런 것 때문에 시위했구나’ 하고 알게 됐죠. 이런 일이 쌓이다 보니 제가 정말 역사적인 현장을 기록하고 있다는 생각을 됐고 기자라는 직업에 관심을 가지게 됐죠.

△어떻게 종군기자가 되기로 했나요
-저는 인생을 70~80년 정도 지구라는 별에 여행을 온 것으로 생각해요. ‘그래서 지구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뭘 해야 보람이 있을까’하는 생각을 많이 했죠. 죽기 전에 많은 걸 보고 겪고 싶지만, 시간이나 돈이 한정돼 있으니 중요한 것 위주로 봐야죠. 제가 일상생활을 보내고 있는 곳은 풍요롭고 안전한 편에 속하기 때문에 일부러라도 찾아가서 지구의 다른 면을 보고싶었어요. 그 중 한 곳이 전쟁터였죠.

그런데 단지 저 혼자 보고 겪기보다는 현세는 물론이고 후세의 누군가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고제 인생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죠. 비극적이지만 무력분쟁이 한 나라의 역사 또는 국제 역사의 큰 분기점이기때문에 그 역사의 현장을 직접 기록하고, 이를 매체에 싣는 종군기자가여러모로 제 인생의 목표에 부합한다고 생각했어요.

△종군기자로 취재하러 갈 때는 어떻게 가나요
-매체에 속해 있는 기자가 아니기 때문에 객원기자 신분으로 가요. 전쟁이 심해지면 여행금지국으로 지정되는데 그곳은 외교부의 허가를 받아야 방문할 수 있어요. 외교부에 여행금지국을 방문하겠다는 서류를 제출하면 여권법에 따라 이후 제출해야 될 서류가 정말 많아요. 그리고 제 목적이 사적인지 공적인 것인지를 증명해야 하죠. 이 때 제가 공적인 목적으로 방문한다는 것을 보장해줄 언론사에 연락해 객원기자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보장받아요. 종군기자로 갈 때는 군의 허락도 받아야 되기 때문에 더 복잡하죠.프리랜서 기자로 가면, 숙박에서부터 통역까지 개별적으로 알아봐야 되기 때문에 품이 많이 들어요. 전쟁이나면 기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가기 때문에 외국인을 위해서 일하겠다는 사람도 드물죠. 물가가 올라, 외국인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기도해서 방문하는 비용은 몇 백에서 몇천까지 들어요.

하지만 객원기자 신분도 아무에게나 발급되는 건 아니에요. 어떤 언론사는 기자증을 발급해주기도 하고 어떤 곳은 신분은 보장해줄 수는 없지만, 갔다 와서 사진을 실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해요. 제가 사망하거나 다쳤을 때 그들이 져야 될 부담이 있기 때문이죠. 언론사가 자사 스텝을 전쟁터에 파견하는 경우도 극히 드물어요. 추가비용을 부담해야 되고, 그 기자가 전쟁터에서 다치기라도 하면 언론사에서 지불해야 될 비용이 많아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나라 언론매체는 외신 사진을 많이 써요. 에이피(AP), 에이에프피(AFP), 로이터통신사와 우리나라 주요 일간지나 매체는 정액제 계약을 해요. 정액제이기 때문에 이 매체들 사진을 한 장을쓰건 여러 장을 쓰건 비용이 똑같죠.

△사진을 한 번 기고하면 대체로 얼마 받나요
-이런 것도 얘기해도 되나요. 정말 싸서 놀랄 거예요. 주요 일간지의 경우 1면이 아니면 아예 공짜로 사진을 달라는 곳도 있고, 심지어는 이름도 실어주지 않겠다는 곳도 있어요. 많아도 30만 원 내외죠. 사이즈나 컬러냐 흑백이냐에 따라서 가격은 달라요. <타임>이나 <뉴스위크>의 경우에는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편이죠. 타임지나 뉴스위크의 더블 스프레드(2면에걸쳐 사진 기재)에 실리면 120만 원 정도를 줘요. 하지만 뉴스위크나 타임과바로 거래하지 않기 때문에 연결해준에이전시에 50%를 지불하고, 세금10~20%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50만 원 정도예요. 국내 일간지는 1면에사진이 게재되면 30만 원에서 60만 원정도를 받지만 외신 표지는 80만 원정도 받으니까 더 많기는 하죠. 그래도 종군 취재의 경비를 사진 값으로만 충당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요.우리나라에 종군 취재만 하는 기자가없는 이유도 이것만으로는 생계를 보장받기 어렵기 때문이죠.

△전쟁 현장을 찍기도 하고, 육군의 일상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합니다.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사진과 전쟁을 수행하는 주체인 군대 사이에는 모순이 있지 않나요
-국가를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집단이나 개인이 비무장으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이상에 가까워 보여요. 전쟁은 힘의 불균형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힘의 균형을 맞추고 있으면 평화가 유지될  수 있어요. 젊은이들이 훈련을 받고 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다고 생각해요. 힘이 있지만 비폭력을 지향하는것과 힘이 없어서 비폭력에 호소하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의 대치 상황 역시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군의 사진은 아무나 찍을 수 있는 것이아니기 때문에 기록이 별로 없어요.특수한 상황 때문에 대부분의 젊은이가 군대에 가는데 그에 대한 사진이없어요. 그게 안타까웠죠.

△너무 힘들어서 후회한 적은 없나요
-아직 포기하고 싶을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레바논에 갔을 때, 전방 쪽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피난을 떠나고, 도시는 폭격을 받아 쑥대밭이 되어 있었죠. 적십자조차 접근하기가 어려운 곳이어서 시체가 다 치워진 것은 아니었어요. 시체가 무너진 건물 안에 들어있어서 냄새와 파리 떼로만 시체의 위치를 추정할 수는 있었죠. 어떤 종군기자가 주택가를 나오면서 부엌에 시체가있다고 했어요. 저도 시체를 찍고 싶어서 그 주택가를 찾아갔는데, 어느 부엌인지는 몰랐죠. 시체를 찾기 위해 문을 하나씩 열기 시작했죠. 햇살이 너무 강해서 건물 안에 들어가면 암적응이 잘안 돼 1초 쯤 물체가 잘 보이지 않았어요. 시체를 찾아 문을 열었다가 없으면 옆집, 또 옆집. 그 1초 동안 시체가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계속 상상하게 되면서 나중에는 시체를 찾게 될까 봐 걱정했죠.‘ 아무도 없는 도시에서 시체와 나만 대면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할때, 이게 뭐하는 짓인가하고 생각했죠.

△전쟁터처럼 위험한곳에 가면 가족들이 걱정하지는않나요
-가족들이 상황을 몰라서 더 걱정하는 것 같아요. 가족들 생각하는 것 만큼은 위험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걱정할 가족을 더 만든다는 것도 쉬운일은 아니죠. 일단 종군기자한테 시집온다는 사람이 없어요(웃음) 저 자신도 약간 두려운 게 있어요. 부인은 어른이기 때문에 저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지만,아이가 생기면 아이한테 정말 미안할것 같아요. 저도 전쟁터에 나가기가 힘들어지지 않겠어요? 아직은 멈출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취재 노하우도 조금씩 생겨나고 있는데, 그걸 멈추기도 싫고, 도대체 언제 결혼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웃음)

△사진가로서 이루고 싶은 꿈은무엇이었나요
-처음 기자가 됐을 때는 <뉴스위크>나 <타임>에 제 사진과 이름을 올리는 게 꿈이었죠. 그 꿈을 이뤘으니 이제는 죽을 때까지 최대한 많이 보고 기록하는 거예요. 할 때까지 하다가더 이상 현장에서 활발히 뛰기 어려운 때가 오면 삼척에 사진관을 내고싶어요. 행복한 사람들을 기록으로 남기고싶어요. 가족사진이나 돌사진, 그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나 변해가는 과정을 찍는 것도 보람찰 거예요.

△부대신문 인물면 공통질문입니다.당신의 20대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대학생 때도 사진에 미쳐서 출석을하기 보다는 사진을 촬영하러 다녔어요. 과제도 잘 내지 않았구요. 그래서 성적이 안 좋았죠. 낮은 학점을 받은 것은 후회하지 않지만 너무 직접 경험만 한 건 후회가 돼요.피드백을 받았더라면 실력이 훨씬더 빨리 늘었을텐데…그 점이 아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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