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지는 것과 방사능에 노출되는 것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그랜드 센트럴>을 제작한 레베카 즐로토브스키 감독은 사랑과 방사능 사이에는 미묘한 공통점이 있다고 정의한다. 방사능은 무색무취 이기 때문에 노출되어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자신도 모르게 방사능에 노출되면 방사능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힘이 든다. 이러한 상황은 사랑에 빠졌을 때와 유사하다. 이 영화가 방사능을 사랑에 비유한다고 해서 낭만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원자력발전소(원전) 노동자의 실상을 최초로 다뤘다. 

남자가 원전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불행의 씨앗이 싹튼다. 그는가진 게 몸밖에 없어서 몸을 담보로생계를 유지한다. 그가 동료의 애인을 사랑하면서 그의 사랑에, 그의 몸에 방사능이 누적되면서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온다. 원전에서의 노동은 늘 긴장감의 연속이다. 잠깐의 실수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사소한 실수로 방사능에 피폭되는 산재를 입지만, 회사에서는 특별한 보상도 없이 오히려 내쫓으려 한다. 방사능에 노출된 양이 많아질수록, 그의 쓸모는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회사는 방사능 수치가 극에 달해 더 이상 노동할 수 없을 때 버린다. 
 
이 영화가 원전 강국인 프랑스에서 제작됐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끌었다. 주목해야 될 점은 원전 노동자의 현실이 비단 프랑스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원전 수출국’이지만 원전노동자의 노동환경 수준은 후진국이다. 영광원 전 경·정비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이 보장하는 법정 휴무일, 퇴직금, 상여금을 보장받지 못한다. 목숨을 걸고 일을 하지만 그들의 목숨 값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친다. 다른 나라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났을 때 적절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수습 현장에 노동자를 투입했다. 방사선 측정계를 구리판으로 가려 실제보다 10배 가량 낮게 방사능 수치가 나타나도록 조작하기도 했다. 도쿄전력은 수습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입은 피폭에 대해서도 함구하고만 있다. 후쿠시마 원전 노동자들은 일상적으로‘ 피폭노동’을 해왔지만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나면서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게 됐다. 하지만 대다수의 언론들이 노동자들을 외면하면서 그들은 전과 같은‘ 피폭노동’을 하고 있다. 늘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방사능과 사랑의 가장 큰 차이점은 사랑은 아픈 기억일지라도 추억으로 남을 수 있지만, 방사능은 병든 몸과 마음만을 남긴다. 
 
우리는 오랫동안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희생의 시스템’에 길들여져 왔다. <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 오키나와>의 저자 다카하시 데쓰야는 '희생의 시스템’을 일본이라는ㅡ사회의 큰 특징으로 정의하지만 이는 일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도‘ 99%를 위한’ 희생의 시스템이 자리잡고 있다. 전기를 생산하는 원전의 노동자, 원전에서 생산한 전기를 송수신하기 위한 밀양 송전탑. 이들은 대다수의 편의를 위해서 희생되고 있다. 밀양 주민들이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언제나 그렇듯이 이 시스템은 그들에게 순응을 요구할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누리는 안락함이 다른 이의 피와 땀으로 뒷받침된다면, 그 안락함은 가시방석과도 같을 것이다. 우리가 암묵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99%에 속한다는 것을 안다면 희생의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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