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연기 인생 30년, 배우 이재용(철학 82, 졸업)

일찍이 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비극을 경험하지 못한자 희극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말을 남겼다. 아무리 기술적으로 뛰어난 연기자더라도 그가 겪은 경험의 폭이 좁고 깊이가 얕으면 ‘반쪽짜리’ 연기밖에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 연기는 보는 이에게 매끄럽다는 인상은 주지만 감동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물론 우리는 TV나 스크린 속 배우의 연기가 단지 ‘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때로 그 연기에 우리가 울고 웃고 분노하는 것은, 배우의 연기에서 삶의 진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여기 진실된 연기를 통해 ‘존재의 탐구’라는 화두를 찾아가는 배우가 있다. 배우 이재용이다.

영화 <친구>의 야비한 깡패 눈칼자욱, 김두한 신드롬을 일으킨 드라마 <야인시대>의 악랄한 일본인 고등계 형사 미와로 관객의 눈 도장을 받았다. 이후에도 <주몽>에서 부여의 정신적 지주 ‘부득불’로, 최근에는 <구암 허준>에서 ‘천수관음의 화신 같은 인의(仁醫)’ 김민세로 시청자들에게 울림을 줬다. 

그는 우리학교 철학과 출신이다. 때문에 서울 소재 유명 사립대학교의 연극영화과 출신이 득세하는 영화판에서 그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배우다. 연기관련 전공이 없는 우리학교에서 배출한 현역 배우 중 대중적인 인지도로는 단연 최고다. 방송과 영화계에는 항상 ‘명품 조연’, ‘악역전문 배우’라는 수식이 늘 따라다니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자신만의 확고한 연기 철학을 지니고 묵묵히 지난 30년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지난 1일, 부경대·경성대 역 인근에 위치한 그가 운영하는 중식당에서 연기 인생과 철학에 대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까만 선글라스에 청자켓을 걸친 그의 외모에서 ‘배우는 배우다’라는 범상치 않은 풍모가 느껴졌다.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이유가 뭔가
-오랜 촬영 때문인지 눈에 염증이 났다. 빛을 직접 보면 안좋다고 해서 끼고 있다. 이해해 달라.

△일일 사극 <구암 허준>이 종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벌써 새로운 작품을 촬영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떤 작품인가
-문화방송(MBC)에서 기획하고 있는 50부작 사극 <기황후>다. 고려시대 궁녀로 원나라로 끌려갔다가 원나라 황제의 황후가 된 ‘기황후’를 주인공으로 다룬다. 나는 ‘왕고’라는 고려의 왕족을 맡았는데 충혜왕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와신상담하는, 권력을 되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고려시대 최고의 마초다.(웃음) 촬영 시작한지는 한 달정도 지났다.

△빼놓지 않고 달고 다니는 이력이 우리학교 철학과(82학번) 출신이라는 것이다. 중학생 때 이미 연기를 하고자 마음먹었다고 했는데, 철학과에 진학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중·고등학교 때 영어 점수가 잘나와서 처음엔 영문과를 가볼 까 했는데 딱히 ‘통수’가 없더라. 마침 세상의 부조리함에 눈을 뜰만한 시기였고 담임이 철학과 출신이서인지 나에게 철학과를 권하더라. 원서도 잘 읽을테니 교수가 될 수도 있지 않겠냐는 거였다. 그 때 한참 법정스님, 정다운 스님 이런 분들 책들이 나오던 때였다. 읽어보니 인간문제가 해결되야 뭐든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철학과에 진학했다. 가면 별별 ‘돌아이’들 만나겠구나 하는 기대도 있었고. 어쨌거나 인생에서 잘한 것 중 하나가 철학을 전공한 거다. 좋은 교수님도 만났고, 내 삶을 내가 어떻게 경영할지 생각하고 고민한 과정이었으니까. 내가 학교 다닐 때 철학과 학생들은 크게 네 유형으로 나뉘었다. 공부만 죽어라 하는 ‘학점벌레’, ‘오직 주님’ 뿐이어서 목자가 되기 위해 죽어라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 죽어라 화염병을 던지는 사람, 그리고 주사파. 술먹고 죽자는 사람 말이다.(웃음) 나는 입학하자마자 극예술연구회에 가입했고 바로 배우로 캐스팅됐다.

△바로 배우로 캐스팅 됐던 이유가 있나. 상상하기 쉽지 않다(웃음) 
-간단하다. 표준말을 구사할 줄 안다. 키가 좀 컸다. 이 두 가지 였다.(웃음)

△극예술연구회에서 활동하는게 쉽지 않은 것으로 안다. 특히 바빴을텐데 수업은 잘 들어갔나
-수업을 어떻게 들어가.(웃음) 오후 수업은 거의 들어간 기억이 없다. 공연 앞두고는 오전 수업도 재껴야 할 판이었으니까. 4학년 수업은 학점 따야 하니까 교수님께 얼굴 도장 찍으러 몇 번 왔다갔다 한 기억이난다. 심지어 장전동 멍멍이들도 즐긴다는 축제 때도 연습을 해야했다. 아주 암울한 20대였지. 시커멓고. 지금은 효원회관(현 10·16기념관)이 공사를 해서 보기 좋고 쾌적하지만 당시엔 범일동 어디엔가 있을법한 삼류 극장의 느낌이었다.

△대학을 다닌 1980년대는 격동의 시대였다. 다른 학생들처럼 시위에 참가하지는 않았나
-결국 폭력에 항거하는 방법이 또 다른 폭력이었고 중간에 운동에 관심을 끄게 된 계기가 구정문 쪽 하숙집에 살 때 있었다. 그 날도 시위가 있는지 집 밖에서 고함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는데 전경 한 명이 시위대 선봉에 선학생에게 ‘어서 집에 들어가라’고 말하더라. 그랬더니 그 학생은‘ 지금 몰라서 집에 가라는 거냐’고 받아쳤다. 알고보니 둘이 형제였던 거다. 형은 시위를 진압하러, 동생은 시위대의 선봉에서 철책을 하나 사이에 두고 맞닥뜨린 것이다. 그 일이 회색 분자로 남은 계기가 됐던 것 같다. 타도의 대상은 먼 곳에 있는데 형제끼리 서로의 얼굴에 돌을 던져야 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물론 많은 유혹의 손길이 뻗어왔다. ‘문화적 전투역량을 지닌 이재용 동지께서 동참해서 구국의 결단을 내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나는 ‘X’까라고 했지.(웃음)

△그런 상황이라면 연기가 도피처같은 존재였을 것 같다
-피난처였지. 일종의 해방구일수도 있고. 청춘이라는게 속에 응어리는 차오르는데 마땅히 풀 곳이 없으니까. 연극이 그 응어리, 에너지를 푸는 무대였다. 연극은 에너지를 굉장히 쓰는 일이다. 연극하면서 울분을 많이 풀어냈다. 학교 앞 다방에서 DJ하면서 음악도 듣고. 예술대학 학생들 중에 괴짜들이 많았다. 미술이나 음악 전공하는 학생들이랑 술먹고 어울리면서 예술얘기고 그런 낙으로 살았던 것 같다.

△정식 연기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졸업 이후에도 계속 부산에 있었다. 연기는 어떻게 배웠나
-동아리에서는 그저 알음알음 선배들이 물려주는 것들을 익혔을 뿐이었지. 서울에서 전무송이나 이호재같은 당대 최고의 연극배우들이 공연오면 관람하면서 기본적인 화법이나 발성을 관찰했는데, 선배들의 어설픈 연기와 전혀 다르더라. 회의가 들었다. 졸업하고 동문극단에 잠시있다가 나오고 다른 극단에서도 해봤는데 별 ‘통수’가 없는 건 마찬가지더라. 여전히 불안하고. 그때는 연기 서적이 쏟아지던 시기여서 이런저런 책 사 읽고, 혼자 방법을 고민했다.

▲ <4요일>에서 사업실패로 빚쟁이가 된 '고경태'를 연기했다.(출처=재하엔터테이먼트)

△이미 영화판에도 데뷔한 상황 아니었나. 그 때도 여전히 확신이 안섰다니 의외다
-여전히 불안했던 거지. 지금까지는 그냥 관성처럼 해왔는데 중원에 얼마나 많은 은둔고수들이 있는지 모를뿐더러, 내 칼이 무라도 썰 수 있는지 궁금하던 차였다. 데뷔를 하고도 밥벌이로 학원에서 연기 입시생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어느날 러시아에서 안드로비치 압살로프라는 교수가 찾아왔다. 러시아의 공훈배우인데, 내 제자가 러시아로 유학을 가서 만났다가 모시고 왔다. 오금이 저리더라. 창피해서 애들을 못 가르칠정도로.(웃음) 그래도 정신없이 시범을 보여가면서 애들을 가르쳤는데, 선생이 한 마디 하더라. ‘어깨가 풀려있다’고. 연기에서 아주 상징적인 지적이었다. 몸이 많이 긴장했으니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하라는 뜻이었다. 나중에 사석에서 맥주 한잔하면서 얘기를 나눴는데 나에게 모노드라마(1인극)를 한 번 해 보라고 제안하더라. 연기에 많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나중에 내 연기를 보시더니 “너는 그 길로 가도 괜찮겠다” 하시더라. 나도 그제서야 ‘이 길로 가도 되겠구나’ 확신이 섰다.

△<억수탕>(곽경택 감독, 1997)으로 스크린에 데뷔한다. 연극을 계속해왔는데 영화에 도전하게된 건 심경의 변화였나
-그냥 연기의 연장이었다. 평소 친분이 있던 전수일 감독이랑 독립영화 찍으면서 단역으로 가끔 등장하던 때였다. 그 때 조재현, 설경구 이런 배우도 같이 찍었는데 연출부에 곽경택 감독이 있었다. 작품이 끝나고 정수일 감독이 곽 감독에게 나를 추천하더라. 그래서 <억수탕>에 스님 역할로 출연했다. 그런데 고작 단관 1회 개봉으로 종영하더니 바로 비디오 가게에‘ 성인물’ 코너로 넘어가더라. 그 예술영화를!(웃음)

△대중에게 처음 배우 이재용의 존재감을 드러낸 작품은 <친구>(곽경택 감독, 2001)에서 맡았던 깡패 ‘눈칼자욱’이다
-시립극단 다니면서 아역배우들을 가르칠 때였다. 어느 날 곽 감독이 오더니 시립극단 사표 던지면 안되냐고 묻더라. <친구>를 찍을건데 전념해달라고. 황당했다. 말이 되냐고.(웃음) 시립극단은 정년까지 돈을 꼬박꼬박 받을 수 있고, 퇴직금까지 얼만데. 고작 다섯 장면에 백만 원 남짓하게 받으러 나오라니 ‘얘가 미쳤나’ 싶었다. 그런데 사실 내가 활동하던 시립극단이 관변단체 느낌도 나고 폐쇄적인 분위기여서 회의감이 들때였다. 이미 아내도 내가 시립극단에서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내에게 물어봤다. 별 기대는 안했는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당신이 지금 주사위를 던지지 않으면 언제 던져보겠느냐. 나이들면 겁나서 못던질걸”라고 하더라. 곧장‘ 땡큐’하고 시립극단에 사표 던지고 ‘서푼짜리’ 영화에 올인했다. 그런데 웬걸! 대박이 났다.

▲ <친구>(2001)에서 비열한 깡패 '눈칼자욱' 역할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출처=씨네라인)

△사실 영화계나 방송계에는 서울 유명 사립대학교의 연극영화과 출신들이 상당수다. 그런 가운데 부산의 국립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정식 연기교육도 받지 못했다는 소외감이나 보이지 않는 장벽같은 것은 없었나
-처음에 느꼈던게 <야인시대>(2002)에 출연할 때다. 그 때는 이미 사람들이 내가 <친구>에 나왔다는걸 어느정도 알아보는 상황이었다. <야인시대>에서 맡았던 일본인 고등계 형사 ‘미와’는 정말 큰 역할이었다. 극 전체를 놓고 봐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비중이었으니까. 사실 나도그런 기회가 올지 몰랐다. 그랬는데 어느 날 모 선배를 SBS 복도에서 마주쳤다. 그 선배가 대뜸 하는 말이 “이재용 씨는 누구 줄이야. 사장이야, 작가야, 아니면 감독이야?”였다. 내가 이렇게 답했다. “저 아무것도 없는데요?”(웃음) 실제로 아무것도 없잖아. 러시아 압살로프 선생님 빼고는.(웃음) 그 때 보이지 않는 경계와 시기같은 것도 있구나 느꼈다.

△얼마 전 종영한 <구암 허준>은 일일 사극으로 화제를 모았다. 본인의 연기가 만족스럽던가
-배우가 자신의 연기에 만족한다는 것은 무덤에 들어갈 짓이다. 단지 내가 의도했던 것과 설계했던 연기에 얼마나 부합했느냐가 있을 뿐이지. 한번은 연기를 마치니까 현장감독이 눈이 시큰해서 울고 있더라. ‘내가 전달하고 싶었던 진실한 감정적인 부분들이 의도대로 전달됐구나’해서 그 때는 기분이 좋더라. 근데 편집이영...(웃음)

▲ <야인시대>에서 일본인 고등계 형사 미와 경부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출처=SBS)

△배우들 중에는 실제로 자신이 연기한 배역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촬영이 끝나도 캐릭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데.
-배우의 몰입도에 따라 다 있지 그런게. 그런데 난 항상 연기를 할 때 총목표를 생각한다. 작품을 통해 내가 드러내고 싶은 것을 생각하지 남들의 기대에서는 벗어난다. ‘ 미와’를 연기할 때는 내가 이 연기를 통해 사람들이 일본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으면 하는 목표가 있었다. <주몽>을 촬영할 때는 여의도 정치인들이 봤으면 했다. 왕과 대립하는 역할이었고 정치적 대항마였는데 명확한 소신이 있었다. 정치 철학의 핵심은 백성이라는 것을 염두하고 연기했는데 그래서 표현할 때 너무 기분이 좋더라.

△지금까지 연기했던 배역 중 가장 애착이 가거나 아쉬운 배역이 있나
-<대물>이라는 작품이 용두사미가 된 것이 가장 아쉽다. 우리나라 현실정치를 적나라하게 까발릴려고 했다. 어느정도까지 였냐면 방송국과 제작사에 변호인단을 꾸려달라 요청까지했다. 외부로부터 각종 고소·고발이 들어오면 ‘맞짱’뜨려고.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야심차게 여의도 1번지의 ‘아랫도리’를 벗기려고 했다. 고현정하고 내가 ‘이거 무조건 시청률 50%’라면서 의욕 충만이었는데, 간작은 방송국과 제작사가 감독을 끌어내리더라. 결국에는 작가까지 교체되면서 어설픈 멜로도 아니고 액션도 아닌 것이 어정쩡하게 됐다. 진짜 지르고 싶은 작품이었는데, 대난장을 치고 싶었는데(한숨)

△늘 따라 다니는‘ 악역 전문’‘ 명품 조연’이라는 수식어가 싫을 때는 없었나. 주연 욕심도 있을 것 같은데
-다 기자들이 분류하기 편해서 그런 말을 붙인 것 아니겠나. 쓰잘데기 없는 말이다. 개성으로 존재하는 배우를 하나의 범주에 도매급으로 묶는 건 사실 실례다. 물론 아무래도 좀 ‘쌘’ 역할을 하고 싶긴 하지. 이제 와서 일일 드라마 같은데 출연하면 영 밍숭할 것 같다. 우선 우리 아내가 싫어한다. “ 당신은 좀 마초다운 역할을 해라. 이재용은 남자다” 하면서.(웃음) 배우가 주연 욕심 없으면 배우가 아니지. 근데 단역이 됐든 주연이 됐든 동기유발이 되는 작품이라면 배역 크기에 상관없이 한다. 사람들이 봤을 때 생각의 자락에 잉크 방울 한 방울 톡하고 찍어줄 수 있으면 된다.

△출연할 작품을 고르는 기준같은게 따로 있나
-없어 그런거. 돈 많이 주면 한다.(웃음) 아들이 셋인데 처와 아들들을 호주로 유학보낸 자칭 생계형 배우다. 물론 시놉시스 같은 거 보면서 ‘출연해서 욕먹겠다’ ‘이 정도면 욕은 안먹겠다’ 정도는 판단하지. 어차피 나에게 오는 배역이 대게 ‘깡다구’ 있는 역할인데, 대개 그런 역할이 등장하는 작품은 보통 작품은 아니더라. 가끔 너무 경직된 작품만 하다보면 지겨울 때가 있다. 그럴 때 ‘바람 좀 쐬고 싶다’하면 가벼운 시트콤 같은걸 찍기도 한다. 그리고 <구암 허준>에서 했던 배역처럼 연기가 힐링이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연기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이 있다면
-존재에 대한 탐구. 불가의 화두라는게 ‘이게 뭐꼬’ 아니던가. 존재는 나로부터 찾기 시작해서 관객, 가족, 사회 등으로 퍼진다. 다 연장선이다. 그런데 이 화두가 쉽게 풀리지 않으니까 풀어가는 방법으로 연기를 했던 것 같다. 결국 연기라는게 사람에 관한 이야기 아닌가. 그러니 이 길로 올 수밖에 없었다.

△진부하지만 궁금한 질문이다. 좋은 연기란 무엇인가

-돌아가신 성철 스님의 법어집 중에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내 자신을 속이지 않으면 내가 표현 하는것에 확신이 생긴다. 내가 나를 믿을 수 있으면 관객도 나를 믿을 수 있다. 연기가 진실해야지 내가 내 자신을 못 믿고 뭔가 꾸며내듯이 하면 보는 사람이 알아챈다. 진실한 연기는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가령 물컵을 들때도 왜 물컵을 드는지, 눈동자를 돌릴때도 과거를 회상하는지, 미래를 예측하고 계산하는 것인지 생각해야한다.

△연기를 시작한 지 올해로 만 30년째다. 지금부터 30년 후엔 뭘하고 있을 것 같나
-그 때도 날 찾아오는 ‘꼬맹이’들이 있으면 같이 연습도 하겠지. 그런데 연기만 하는 건 아니고 세상 그늘 진 곳 살피는 사람으로 살아봤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특히 배고픈 예술인들을 돕고 싶다. 지금도 홍대 앞 인디밴드를 홍보하면서 돕고있다. 가끔 무대에서 즉흥으로 블루스도 부르고.(웃음)

△드디어 마지막 질문이다.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
- 많은 후배들이 4학년이 되면 현실적인 고민들을 많이 하는 것으로 안다. 생각의 틀이 삶의 틀을 결정한다고 하지않나. 아직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세상이 만들어 놓은 범주 안에 ‘안전빵’으로 들어서는 것 말고, 새로운 범주를 만드는 그런 디자이너가 되면 좋겠다. 기성의 질서가 만드는 왜곡된 범주가 얼마나 많나. 그런 것을 깨부수고 새롭게 합리적인 창의적인 그런 범주들을 디자인하는 후배들이 부산대학교에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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