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기획회의를 할 때마다, 기사의 선정과 배치만큼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도 없는 것 같다. ‘다수가 관심을 가지는 소식’과 ‘화제성은 없지만 꼭 알아야 하는 소식’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은 상당한 판단력을 요한다. 국정원 사태에 연이은 ‘학내 종북 몰이’는 필자에게 여론에 대한 고민을 안겨주었다. 과연 총학생회가 표적이 된 ‘종북 몰이’를 여론으로 볼 수 있을까.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만 보면 총학생회에 대한 불신이 쌓였고, 그 흐름 속에 ‘종북 몰이’가 시작됐다. 총학의 정치색 논란이 오프라인에서 는 치열한 대자보로, 온라인에서는 범람하는 글들로 나타났다. 이 외침 역시 여러 목소리가 모이면 여론으로 형성될 것이다. 여론은 대중들 속 ‘큰 목소리’ 혹은 다수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늘 여론이라는 말을 듣고, 쓰지만 대중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실체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실체 없는 존재의 목소리’는 사회 곳곳에서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대개 이 여론은 ‘누군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다수의 의견’이라는 가정이 뒤따른다. 국회에서는 이석기 사건으로 다수당이 소수 정당의 목을 옥죄고 있다. 민주당의 장외 투쟁이 길어지자 새누리당 측에서는 민생이 악화되고, 민심이 돌아서는 것을 내세우며 국회선진화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여론 몰이는 그치지 않는다. 이석기 의원이 속해있던 통합진보당이 자진 해체해야 한다는 의견과 그 정당에 속한 의원들의 의원직을 박탈해야 된다는 의견 역시 난무하고 있다. 다수라는 이름은 언제나 무섭다. 한 명의 개인이 도덕적일지라도 개인들이 모인 집단은 광기를 발휘할 수 있다. 이는 역사가 증명해준다.

여론은 ‘폭력’을 동반하기도 한다. 한국전력은 여론이라는 미명하에 밀양 송전탑 건설을 강행하려 한다. 밀양에 희망버스가 닿을 때는 자신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우려해 공사를 중단하다가 다시금 여론의 이름을 빌리려는 것이다. 한국전력은 전력 대란으로 무더운 여름을 보내야만 했던 국민들의 원망에 ‘송전탑 건설을 중단하는 것이 전력 대란에 일조하는 것이다’고 답하고 있다. 여론 수렴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국민 대다수가 송전탑 건설을 찬성하는 것인 양 주장하고 있다. 전력난의 책임은 정작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덮어두고서 말이다. 여기에는 다수의 편의를 위해 소수는 희생되어도 괜찮다는 논리도 내포되어 있다. 다수의 논리는 대개 타당해보이지만, 더러는 폭력적이다. 여론은 목소리가 큰 사람의 논리, 혹은 다수의 논리로 결정되어 왔다. 그것이 반드시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 ‘다수가 원하기 때문에 ’혹은 ‘여론은 이렇기 때문에’라 는 말로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할 때 침묵하고 있다면 그 논리가 나의 목소리인양 호도될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누군가 나의 뜻을 곡해하고 있다면, ‘아니’라고 의사 표명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론은 양날의 검이다. 여론의 힘이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세상사는 달라져 왔고, 앞으로도 달라질 것이다. 다수라는 이름의 폭력을 막는 힘은 당신에게서 출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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