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발행된 부대신문은 2학기 개강호로‘ 국정원 사태에 대한 대학사회의 움직임’을 1면 머릿기사로 다뤘다. 7면에도 시국대회 현장 소식을 담으면서 비중있게 다뤘다. 이번 주 신문도 국정원 사태에 대한 학생 여론조사를 실었고, 쟁점을 분석했다. 하루가 다르게 식어가는 국정원 사태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독자들의 문의와 질타가 이어졌다. 학내 언론으로서 ‘중립성’을 잃고 ‘왜곡’을 하는 행태가 이른바‘ 종북좌익’ 언론들이 국정원 사태에 대한 보도 행태와 다를 바 없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지적도 있었다. 정중히 되묻고 싶다. 무엇이 탈중립이고 왜곡이란 말인가.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국체로 하는 대한민국 공당의 국회의원으로서 체제 전복을 꾀하고 공동체 사회에 적대적인 발언을 했다. 그래서 그의 발언은 진의 여부와 상관없이 정치적·도의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만약 실제 행동에 옮긴 증거나 그에 상당하는 구체적인 징후가 발견된다면 법적인 처벌도 엄중히 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다. 그의 발언에는 구체성도, 그 이상의 ‘내란음모’로 진전될 만한 여지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를 공안사범으로 처벌할만한 결정적인 증거도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숱한 매체와 평론가들의 평처럼, 그는 주체사상에 빠져 있는 어느 젊은 운동권 학생의 사고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석기’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당연하다. 그는 국정원 사태와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은 풀리지 않았다. 국정조사에서 증인들과 일부 여당 의원들이 보인 행태는 납득하기 어려웠고 새로운 의혹들도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이석기 사태’가 국정원에 면죄부라도 준다는 것인가. 국정원 사태가 무마될 이유라도 되는가. 아니다. 국정원 사태에 대한 의혹과 관심을 유지하고, 이석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다.

일련의 사건들이 국정원의 ‘승부수’ 혹은 ‘무리수’로 비치는 것은 대대적인 개혁 요구에 직면한 국정원의 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승부수란 보통 불리한 상황에 놓인 처지를 일순간에 뒤집기 위해 사용되는 전술을 뜻하지 않던가. 바둑에서는 죽을 위기에 처한 대마를 구하기 위해 던지는 회심의 수를 칭하기도 하고, 의도를 쉽게 간파당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아리송한 수를 두기도 한다. 그러나 국정원의 이번 수는 돌을 던진 시기나 상황이 너무나 절묘하다. 명백한 ‘승부수’다. 자신의 불리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급작스럽게 정적을 역적으로 몰아세우는 것, 조선시대 정치사에도 일상적으로 기록되는 수다. 물론 역사적으로 정적을 제거하고 마찬가지로 부폐하고 무능한 무리들이 살아남기도 한다. 그렇지만‘ 절대 악’으로 규정한 대상을 제거한다 하더라도, 남은 무리의 원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 국정원과 이석기에게 필요한 것은 국민을 기만하고 시선을 서로에게 돌리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제기된 의혹에 대해 속 시원히, 보편적으로 납득할만한 진실을 밝히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원과 이석기를 따로, 그리고 동시에 바라보는 냉철하고 분별적인 사고다. 한 눈 팔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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