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사무실에서 흰색 셔츠를 입고 업무를 한다. 다른 한 사람은 푸른색 작업복을 입고 공장에서 상품을 조립한다. 두 사람은 같은 시간동안 일해도 소득이나 사람들의 사회적 인식은 판이하다.
 

앞선 사례에서 전자와 같은 정신노동자를 흔히 화이트칼라, 후자와 같은 육체노동자를 블루칼라라고 한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에는 심신관이 자리 잡고 있다. 심신관이란 이름처럼 사람의 몸과 정신의 관계를 살피는 것을 말한다. 서양 철학에서 심신관은 오랫동안 심신이원론이 주류를 이뤄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음과 몸을 각각 형상과 질료라는 요소로 나누어 설명했고 데카르트는 둘로 구분하되 뇌 안에 ‘송과선’이라는 가상의 연결선을 설정해 분리된 관계에서 발생하는 모순을 해결하려 했다. 이러한 서양의 이분법적 심신관은 몸과 정신 사이에 우열이 존재한다는 이론의 기반을 제공했다.
 

산업혁명으로 촉진된 분업은 육체노동으로부터 정신노동을 분리했다. 이러한 분리는 과학이나 기타 문화 발전에 기여한 진보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호 적대적인 계급사회에서 정신노동은 지배계급의 특권이 되는 한편, 육체노동은 피착취계급의 운명이 될 수밖에 없다. 지배층은 타인의 육체노동을 착취하려는 의도로 육체노동보다 정신노동에 우월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지배층은 억압적 체제를 통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업을 긍정하고 우열을 나눴다. 중세 기독교 금욕주의는 이러한 지배층의 의도적인 이데올로기의 대표적인 예다. 몸 욕망의 근원이기 때문에 쉽게 충동에 빠지고 이에 따라 마음이 흐려진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몸을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양에서도 오랫동안 심신이원론적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정신을 중시하고 신체를 경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특히 우리나라는 오랜 유학사상의 영향으로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가 더욱 공고해 졌다. 안용규(한국체육대 레저스포츠) 교수는 “현대철학은 몸과 마음의 양자택일적 이분법을 극복하고 조화를 추구하는 과제를 갖고 있다”며 “건전한 체육 문화 확산이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물론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정신과 육체는 별개의 영역이 아니다. 정신이 신체에 퍼져있는 신경망을 통해 행동을 지시하고 통제하여 신체는 근육을 통해 정신 기능을 유지 보존하고 활동을 원활히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체의 유연성은 곧 정신 기능을 효율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이다. 박인호(동아대 생명과학) 교수는 “오늘날 생명과학은 마음을 신경계의 작용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으로 본다”며 “몸과 마음은 둘로 나눌 수 없는 것”이라고 전했다. 흙집학교 흙처럼아쉬람 고제순 교장도 “인간은 몸과 마음을 지닌 영혼의 존재이기에 육체와 정신노동의 균형이 필요하다”며 “정신노동 위주로 살아온 사람은 몸의 움직임을 늘려야 하고, 육체노동 위주로 살아온 사람은 마음의 움직임을 늘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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