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영화를 본다고 말한다. 그리고 극장을 나와서 영화를 재미있게 봤느냐고 묻는다. 이 질문은 관용적 표현이기도 하지만 정작 우리가 영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영화를 감상하는지, 나아가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담고 있다. 영화를 본다는 상태와 영화의 재미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무수히 많은 영화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 또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영화에 대해 무엇을 기대하고,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영화’의 토대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다.

‘고정’을 넘어서 ‘움직임’으로

보는 행위는 영화의 시작부터 유래했다. 현재의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가 공개했던 1895년 12월 28일의 짧은 무성영화와 확연히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최초의 영화는 오로지 보는 행위로 인해 가능했다. 보는 행위는 그림의 프레임, 연극(오페라와 발레 등 무대예술)의 프로시니엄 아치를 보는 행위와 비슷하지만 다르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 스크린을 바라볼 뿐이지만 뤼미에르의 영화는 기차가 역으로 들어오고, 공장 문이 열리면 노동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아이들이 눈싸움을 할 때 자전거를 탄 아저씨가 미끄러지는 것을 보여준다. 당대의 순간을 기록한 것만으로 영화가 가능해진 것이다. 당시의 관객들은 이런 모습을 지켜보았을 뿐이지만, 이 경험으로 인해 우리에게는 ‘영화’가 생겨났다. 프랑스의 미술사가 다니엘 아라스의 말처럼 ‘그림이 일어나’거나 그림이 우리를 ‘불러 세우는’ 것 같은 느낌이 영화와 마주할 때 일어나게 되고, 부동의 상태가 불현듯 활동하는 순간과 맞닥뜨리게 된다. 우리는 영화를 볼 때 평면 스크린에 비치는 영상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거나 우리를 멈춰 세우고 스크린 안의 인물들과 마주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즉 영화는 상영되는 순간부터 우리에게 움직임의 마법을 선사한다.

카메라가 움직인 순간, 일어난 변화

영화의 러닝타임이 길어지면서 영화에 이야기가 도입되고, 이야기를 구조화시키는 방법들이 고안되고 실험되었다. 무엇보다 한 곳에 고정되어 있던 카메라가 이동하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 사고하기 시작했다. 고정된 카메라에 포착된 삶의 일부와 일상의 풍경이 카메라의 움직임과 더불어 시야가 넓어졌고, 볼 수 있는 방법도 다양해졌다. 이를테면 뤼미에르의 촬영 기사들은  배나 자동차 등 움직이는 이동수단에 카메라를 싣고 촬영을 하거나 이국의 풍광을 담기 위해 낯선 나라를 찾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 현재 우리들이 보는 영화는 고정된 카메라 위치에서 촬영한 단일한 숏보다 다양한 각도와 크기를 가진 숏이 더 많고, 피사체를 따라 카메라가 움직이는 숏이 훨씬 더 많다. 카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뤼미에르의 *타블로는 그 순간 기록된 세상의 모습을 넘어서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리얼리티와 영화의 관계를 질문하기 시작했다.

카메라는 ‘감독의 눈’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운동을 선사했고, 운동은 숏의 배치에서도 발생하지만 무엇보다 카메라의 움직임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카메라는 감독의 위치를 대신하는 곳에 놓여 있을뿐더러 감독이 구상하는 세상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카메라가 피사체를 따라서 움직이는 경우도 있고, 카메라의 시선이 자의적으로 운동하는 경우도 있다. 시점 숏까지 더해지면 카메라의 이동으로 발생하는 운동의 상태와 활동하는 범위가 꽤 다양해진다. 또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영화의 지속과 단절을 경험할 수 있으며, 감독마다 고유한 숏의 리듬도 느낄 수 있다. 봉준호의 횡축 트래킹이 인상적인 <살인의 추억>(2003)과 <마더>(2009)를 예로 들어보자. <살인의 추억>에서 현장검증을 하는 논두렁을 따라가는 행렬과 동반한 카메라의 횡축 트래킹은 살인 사건의 현장을 보여줌과 동시에 살인 사건을 대하는 당시 경찰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포착한다. 그들은 우왕좌왕하다가 넘어지고 동네 사람들과 기자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어버린다. <마더>의 마지막 장면은 이전까지 대부분 수직으로 움직여오던 이 영화의 방향성을 흩어놓고, 망각하기 위한 엄마의 몸부림이 이해 불가능한 영역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듯, 체념하는 방향으로 변한다. <살인의 추억>은 감독의 정확하고 간명한 의지를 따르고 있기에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당대 한국사회의 면모를 추출하는 셈이 되는 반면, <마더>의 움직임은 첫 숏에 등장한 으스스하고 음울한 엄마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과 대비를 이루면서 살인을 은폐하고 망각하려는 엄마의 심연을 헤아려보려는 시도가 된다. 샘 멘더스의 <1917>(2020)의 카메라는 전쟁터를 관통하는 인물들과 일체를 이룬다. 인물들이 공간을 가로지르고 장애물을 건널 동안 육신 없는 카메라의 시선은 그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스스로 활동까지 장착한 전능한 존재가 된다. 인물의 육신과 기계의 전능성이 합체된 <1917>에서 △관찰과 행위 △내러티브와 스타일 △리얼리즘과 리얼리티는 동일한 역할을 수행한다. 체험으로서의 ‘영화’, 경험을 추동하는 카메라가 <1917>을 가능하게 한다. 이와 달리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2004)과 <엉클 분미>(2010)는 카메라가 자의적으로 밀림을 향해 진입하고 정글의 무수한 혼령들을 찾아다니며 장고한 신화의 세계를 발견하기 위해 현미경 같은 시선을 견지한다. 카메라는 서서히 움직이면서 자연과 시간을 탐험하고 자연에 깃든 혼령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거나 자취를 찾아 헤매다가 길을 잃기도 한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카메라와 인물의) 움직임을 보고 경험하며, 정지된 순간에 일어나는 운동의 소멸을 느낀다. 부단히 운동하는 카메라는 이야기에 복무하기도, 이야기를 뛰어넘기도 하고 새로운 현실을 포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요즘처럼 마스크를 쓰고 극장을 찾아야 할 때‘영화’들의 고유한 리듬을 느끼는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엉클 분미>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출처 IMDB
열차의 도착, (뤼미에르 형제), 출처 IMDB
열차의 도착, (뤼미에르 형제), 출처 IMDB
마더, (봉준호), 출처 IMDB
마더, (봉준호), 출처 IMDB

 

*타블로 : 연극에서 ‘장’이라고 번역되는 용어로 초기 프랑스 영화에서 타블로는 오늘날의 숏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박인호 영화평론가
박인호 영화평론가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