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로새긴 오월의 열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살되면서 유신 체제가 붕괴했다. 당시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이 같은 해 12월 12일 군사 정변을 일으키고 다음 해인 1980년 5월 17일에는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내렸다. 그러나 시민들은 신군부 세력의 △국회해산 △언론 검열 △전국 대학 휴교령 등에 반발했고 전국 각지에서 저항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대표적인 지역으로 △광주 △서울 △부산 등이 있었다.

부산에서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

부산에는 총 4차례의 움직임이 있었다. 대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져 집회를 하지 못하게 되자 학생들은 광복동과 남포동 일대에서 유인물 배포 및 시위를 계획했다. 그러나 군인과 경찰이 주둔하고 있어 적극적인 시위로 이어지지 못했다. 4번의 움직임 가운데 2번은 미수에 그쳤고 2번은 유인물 배포에만 성공했다. 

가장 먼저 일어난 일은 1980년 5월 18일 강용현과 이우주가 남포동과 광복동 거리에 유인물을 배포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유인물을 배포하기 전 경찰에 발각돼 이우주는 체포되고 강용현은 도피했다. 배포하려던 유인물은 5·17 계엄 확대 및 신군부 등장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 이들이 움직인 5월 18일에는 광주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아 유인물에 반영돼 있지 않았다.

두 번째로는 5월 19일 우리 학교 학생이었던 △노재열 △김영 △배정렬 △김경희 등이 계획한 유인물 살포가 있다. 이들은 학생들을 모으고자 노력했고 5월 18일 하루 동안 유인물 제작에 힘을 썼다. 광복동의 △미화당백화점(노재열) △부영극장(김영, 남경희) △구두방골목(배정렬) 등에서 유인물 배포와 시위를 하려는 계획을 수립했다. 5월 19일 오후 7시 45분경 수백 명의 학생들이 광복동과 남포동 거리 일대에 모였다. 하지만 군인들이 주둔해 음습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시위를 진행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노재열 등은 유인물을 살포했고 노재열, 배정렬은 피신했으나 김영과 남경희는 현장 체포돼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당시 유인물에는 전두환의 쿠데타를 비판하는 이야기만 담겨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광주의 상황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세 번째로 계획된 시위는 신종권과 이광호 등이 참여했지만 실패한 사건이다. 이들은 5월 20일부터 계획해 5월 25일과 26일경에 본격적으로 시위하려 했으나 5월 23일 모의과정 도중 발각돼 전원이 검거됐다. 그중 신종권만 계엄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유인물의 내용은 광주에서 일어난 학살을 막자는 데 있었으나 배포에는 실패했다.

끝으로 5월 25일 김재규 등이 중심이 되어 광주의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 살포에 성공했다. 11여 명 정도가 참여해 남포동에서 유인물을 배포했으며, 계엄 당국이 이들을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김재규 등은 서면에서 시위까지 이어가려 했지만 시민들이 모이지 않아 실행하지 못했다.

이처럼 부산에서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은 유인물 배포는 성공했으나 시위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한계점이 있다. 그러나 광주의 학살 사건을 전하려고 했다는 점과 가능한 방법을 전부 동원해 민주화운동을 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부산지역 5·18항쟁과 그 의의>를 기술한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 차성환 상임위원은 “신군부의 거짓 선전에 대해 광주의 진실을 알리려 했다”라며 “시민들이 당시 상황에서 침묵하지 않고 저항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1982년,부미방 사건으로 이어지다

부산의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당시에 그치지 않고 1982년에 다시 이어지게 된다.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하 부미방 사건)이 일어났다.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알게 된 문부식 등은 이에 분노했고 부미방 사건을 일으켰다. 이들은 전두환 정권이 ‘5·18 지우기’에 급급한 사실을 비판하고 당시 사건을 방관한 미국 정부에 책임이 있음을 알리고자 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은 전두환의 독재 정권을 옹호했다. 이에 주동자들은 5·18이 일어난 때에도 미국이 작전권을 지니고 있었기에 미국의 승인이 없었더라면 학살이 어려웠을 것이라 추측했다.

부미방 사건의 시초는 1980년 12월 9일에 일어난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다. 광주에서 일어난 방화 사건은 미국의 방관을 비판하고 전두환 정권의 만행을 알리고자 일어났다. 그러나 신군부는 사건을 은폐하고자 화재의 원인을 누전으로 보도했다. 부미방 사건을 이끈 사람들은 광주 미국문화원 사건처럼 사건이 은폐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낮에 미국문화원에서 방화를 시도했다. 불길이 치솟자마자 이들은 전두환 정권과 미국을 비판하고자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는 내용의 유인물을 부산 곳곳에 배포했다. 그러나 방화의 결과 무고한 시민이 죽음을 맞게 됐다. 그들의 예상과 달리 불길이 한순간에 퍼지는 바람에 한 사람이 목숨을 잃고 세 명이 중경상을 입게 된 것이었다. 사건이 일어나고 2주 뒤 부미방 사건의 주동자들이 붙잡혔다. 관련자들에게 △사형 △무기징역 △징역 3~15년 등이 선고됐다.

부미방 사건은 5·18 민주화운동이 기폭제가 되어 일어났지만 그 후 민주화운동에 영향을 미친 사건 중 하나였다. 미국을 우방국이라 생각하던 사람들이 제국주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으며 강원대 반미시위가 일어나는 데 일조하게 했다. 전문가들은 부미방 사건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차성환 상임위원은 부미방 사건에 대해 “이제는 부미방 사건을 재평가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전남대학교  5·18 연구소 박경섭 전임연구원은 “부산의 학생들이 직접 5·18항쟁을 겪지는 않았음에도 진실을 밝히고자 부미방 사건을 일으킨 것이었다”라며 “고문이 횡행했던 당시에도 힘썼던 이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라며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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