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로새긴 오월의 열흘

민주주의의 초석이 된 5·18 민주화운동이 올해 40주년을 맞았다. 40년의 긴 시간 동안 여전히 정립되지 않은 5·18 민주화운동의 이야기와 부산에도 있었던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부대신문>이 재조명했다.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의의를 알아보고자 <부대신문>이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연구하는 박경섭 전임연구원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전남대학교 5·18 연구소 박경섭 전임연구원
전남대학교 5·18 연구소 박경섭 전임연구원

 

△5·18 연구소 및 하시는 일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린다.
5·18 연구소는 1996년에 설립된 전남대학교 부설 연구소다. 10일간의 광주 민주항쟁 당시의 사건 자체뿐만 아니라 참여한 사람, 피해자 등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또한 5·18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이념이자 가치인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 △사회운동에 관한 연구와 5·18 관련 연구 용역, 기념사업도 진행한다.

본인은 문화인류학을 전공해 공동체와 도시 공간 연구를 주로 해왔다. 5·18 민주화운동과 이 운동이 일어난 광주라는 공간과의 관계를 연구했다. 최근에는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일기가 발견돼 이를 연구하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설명 부탁드린다.
5·18 민주화운동은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간의 운동으로 종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전후의 상황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작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존의 독재자가 죽은 탓에 민주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은 꽃을 피웠다. 그러나 그해 12월 12일 쿠데타가 발생해 전두환의 신군부 독재가 시행됐다. 그 당시 상황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정국이었다. 다음 해 3월, 개강과 함께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고 민주주의와 헌법 개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민주화의 목소리가 일고 있는 가운데 당시 신군부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은 불안감을 느꼈다. 이에 1980년 5월 18일 자정에 확대 계엄령이 실시됐다. 주요 도시에는 계엄령이 내려졌고 공수부대가 대학을 점령했다.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정문에서 계엄 해제와 휴교령 철폐를 외치며 시위했다. 그러자 공수부대가 학생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시민들도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21일에 시민군이 계엄군과 공수부대가 버틸 수 없을 만큼 늘어났다. 계엄군과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이뤄졌다. 시민들은 무장하고 공수부대에 맞섰다. 22일 군부대가 퇴각하며 광주를 포위했다. 22일부터 26일까지는 ‘해방광주’라 불리기도 했다. 닷새간 광주가 고립되어 포위됐지만 한편으로는 광주 전역에서 청소와 시신 수습이 이뤄졌다. 27일 새벽에 계엄군이 다시 들어와 광주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들을 진압하며 항쟁이 종료됐다. 5·18 민주화운동은 전두환의 군부 독재 정권을 정당화하는 데 걸림돌이 됐다. 이 때문에 전두환 정권은 5·18 민주화운동을 언급하지 못하게 했다. 그럼에도 5·18 민주화운동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됐고 1987년 6월 항쟁까지 이어져서 군부 독재가 종식되는 데 까지 영향을 미쳤다.

△5·18 민주화운동 지니는 의의는 무엇인가?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줌과 동시에 대한민국을 민주주의로 이끈 운동이라 생각한다. 본인은 5·18 민주화운동 자료와 증언을 연구하면서 민주주의나 인권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는지를 크게 느꼈다. 당시엔 민주주의나 인권이 보장되지 않았다. 민주주의가 왜 소중한 일인지 깨닫게 만드는 사건이 5·18 민주화운동인 것이다. 특히 공수부대의 무차별적 폭력과 그에 맞섰던 국민들의 대담함에 대해 고민이 깊다.‘어떻게 공수부대는 국민을 무자비하게 살해할 수 있었는가’, ‘이에 맞서 사람들은 어떻게 싸울 수 있었을까’이런 부분들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총살한 것, 무자비한 폭력에 맞서 싸운 것처럼 인간이 얼마나 최악일 수 있는지, 반대로 얼마나 용감할 수 있는지 이러한 근본적인 생각을 하게 만든다. 교과서에는 그 사건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기여했고 많은 사람의 희생이 있었다고만 서술돼 있다. 5·18 민주화운동이 민주주의에 기여한 주요 사건이었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인 윤리적 책임 문제나 존엄성 문제 등도 함께 살펴봤으면 좋겠다.

△이와 관련해 풀리지 않은 의혹도 있다던데, 맞는가?

발포명령자와 행방불명자에 대해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 계엄군 공수부대가 국민들을 총으로 쐈음에도 이를 지시했던 발포명령자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누군지 짐작만 할 뿐이다. 또한 광주 사건 당시 행방불명된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계엄군이 연행했지만 돌아오지 못한 시민들이다. 5·18 민주화운동으로 죽음을 맞이했지만 행방불명돼 신원 확인이 되지 않는 이들에 대해 암매장의 의혹이 남아 있다. 피해자와 암매장과 관련된 이야기는 많지만 밝혀지지 않아 규명되지 않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이 사실 왜곡이나 폄훼에 대해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특별법>을 통해 광주 시민 피해자들의 명예가 어느 정도 회복됐고 <특별법>에 근거해 피해 보상을 받기도 했다. 여러 기념사업도 진행되고 있지만 정작 5·18 민주화운동의 왜곡이나 폄훼를 대처하는 것에는 미흡하다고 느낀다. 일부에 의한 왜곡이나 폄훼로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들이 다시 한번 상처를 받고 있다. 2차 가해가 계속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이 좀 더 필요하지 않을까. 특히 온라인상에서 횡행하게 일어나는 2차 가해에 대한 처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별법>이 1995년 제정된 법이기에 당시에는 이런 부분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에 새로운 처벌 법안 마련 또는 기존 법안 개정 등이 논의되고 있다.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국민들의 꾸준한 관심이 필요하다. 40년이 지났기 때문에 기억하는 사람은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 작년 12월 27일에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5·18조사위)가 구성되고 활동이 시작됐다. 5·18조사위에서는 당시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진상을 기록하고 풀리지 못한 의혹을 규명하고 있다. 진상 규명과 관련된 보고서 작성도 중요하지만 이보다는 모두가 5·18 민주화운동을 같이 고민하고 그 가치를 함께 토의하며 확립해가는 것이 진상규명의 주요한 활동이어야 한다. 국민들의 참여를 통한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많은 5·18 민주화운동 자료가 쌓여 오긴 했지만 진실을 밝힐 핵심적인 근거는 부족하다. 결정적인 증거는 갑자기 등장하지 않는다. 증거 확보를 위해서는 당시 사건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보편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분위기가 마련되어야 새로운 제보나 증언들이 나타날 수 있다. 양심선언을 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계엄군에 관해 40년이 지나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해자면서 피해자인 사람들이 진상규명에 참여해야 중요한 사실과 진실이 밝혀지리라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5·18 민주화운동을 어떻게 기억했으면 하는가 ?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 속에 5·18 민주화운동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 4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니 기억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광주를 기억하자, 관심을 가지자’라는 이야기는 잘 와닿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세월호나 폭력 사건, 국외 홍콩 사태처럼 민주주의나 인권과 관련된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 그 사건을 해결하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5·18 민주화운동도 함께 떠올렸으면 좋겠다.

또한 시민의 참여가 확대될 수 있는 장이 마련돼야 한다. 우리가 지금 접할 수 있는 것은 국가에서 주도하는 기념행사뿐이다. 보다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행사가 진행됐으면 한다. 다수가 5·18 민주화운동을 이야기하고 상상하고 참여할 수 있는 계기나 공간, 폭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통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도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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