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상 수상은 우리나라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이러한 수상 배경에는 뛰어난 작품성뿐만 아니라 영화 대사를 맛깔나게 살린 번역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극 중‘짜파구리’를 서구권 관람객들이 이해하기 쉽게 라면과 우동을 합친 ‘람동(ramdong)’으로 옮긴 게 대표적이다.

이뿐만 아니라 OTT 서비스의 시장이 커지면서 번역의 중요성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해외 유튜버의 영상을 찾아보고, 해외 드라마와 영화를 시청하는 문화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지난 3년 간의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 넷플릭스가 우리나라에 영상을 서비스하기 위해 등급 분류를 요청한 국외비디오물은 총 4,074건이다. 같은 기간 등급 분류된 전체 국외비디오물 8,369건의 48.6%를 차지했다. 이렇듯 커져가는 영상물 시장에서 번역의 중요성을 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통번역진흥원 전임식 실장은 “번역은 중요한 경쟁력 중 하나”라며 “번역은 단지 언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막을 읽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각 나라의 문화를 고려해 이뤄져야 하는 작업이다”라고 전했다. 

 

돈 · 시간 · 인식
삼진아웃

커지는 중요성에 반해 번역가에 대한 처우는 열악한 실정이다. 가장 큰 문제는 급여였다. 대다수의 번역가들은 케이블 방송용 40분 드라마를 기준으로 했을 때 20~30만원의 돈을 받는다. 하지만 관계자들은 이처럼 낮은 급여로는 생계를 이어나가기 힘들다고 말한다. 영상번역작가 A 씨는 “작품 하나당 3일 정도의 시간이 걸리기에 많은 작품을 맡기 힘들지만, 일주일에 작품 하나를 작업해서 30만원을 받으면 생계가 어렵다”라며 “어쩔 수 없이 무리를 하면서 더 많은 일을 맡아 진행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번역가들의 수입은 낮은 편이다. 번역 전문 프리랜서 사이트 ‘ProZ.com’은 매년 영향력이 크거나 뛰어난 언어 전문가들을 선정해 ProZ.com Community Choice Award를 수상한다. 번역가들의 교육에 관한 블로그 ‘Thought on Translation’은 2016년과 2018년에 해당 상을 수상했다. 이 블로그에 따르면 프리랜서 번역가들이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과 비슷한 수준의 재정적 안정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일년에 $ 75,000 ~ $ 90,000의 수입이 필요하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워크넷 기준으로 일년 평균 3,341만원의 수입을 가진다. 전임식 실장은 “시장경쟁이 치열해 번역가 단가가 십 년 넘게 오르지 않고 하향평준화 되어 있다”라고 설명했다.

번역 작업을 위해 주어지는 시간이 부족한 것도 문제다. 번역가에게 허락된 시간은 짧다.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번역은 대부분 1주일 이내로 작업을 끝내야 한다. 케이블 방송용 영화의 경우 상황은 더욱 힘들다. 영화 한 편 당 3~4일 내로 번역을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영상번역작가 B 씨는 “보통 케이블 방송 같은 경우 45분 분량의 드라마는 2~4일의 시간을 준다”라며 “시간을 짧게 주면 작업하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단축되는 경우가 많다. 수입사나 번역 납품 업체에서 방송 스케줄 등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일정을 조정하기 때문이다. A 씨는 “일주일에 번역 작업을 3~4개 정도 하기 위해 정해둔 스케줄이 있는데, 업체의 통보로 작업일정이 틀어지는 일이 많았다”라고 말했다. 

번역 시장의 열악한 현실은 번역의 질을 담보하지 못하게 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는‘종대’를 뜻하는‘column’을‘횡대’로 번역하는 등의 오류를 범했다.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에서는 당연하다는 의미를 뜻하는‘water is wet’을 홍수라고 오역하는 등의 실수가 일어났다. 이러한 오역들은 번역가의 자질을 의심하는 비판의 목소리를 자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번역가들의 실력 부족이 아닌 시간과 돈과 같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오역의 원인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전임식 실장은 “수입사 및 배급사들은 대량으로 번역 작업을 맡겨 최대한 빨리 결과물이 나오게끔 하고 있다”라며 “번역은 공식대로 산출되는 작업이 아니라서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시간에 쫓겨 퇴고 작업을 못하게 되면 전반적인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B 씨 역시 “충분한 조사를 통해 맥락이나 문화적인 요소를 고려해 번역을 해야 하는데 급하게 작업하다보면 오역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라고 전했다.

이는 영화 번역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일차적인 원인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번역을 영화에서 중요한 요소가 아닌 부수적인 요소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번역은 영화의 흥행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영화 제작 후 번역료 등 부대비용에 큰 돈을 쓸 수 없다 △영문과 학생이라면 영화 번역을 어지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등의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에 대해 곽중철(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명예 교수는 “더 큰 흥행을 할 수 있는 영화가 번역 때문에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라며 “제작비를 많이 쓰고도 비전문적인 번역가를 저렴한 단가로 고용하는 바람에 해외시장에서 응분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번역가도 관객도 즐길 수 있는
자막을 위해서는

번역 시장의 상황 개선을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움직임이 우선돼야 한다. 번역 사업을 위한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기 앞서 공공기관이 발주하는 번역료부터 조정해야한다는 것이다. 공공부문 번역 사업은 대부분 입찰 형태로 이뤄져 최저단가가 낙찰되는 형식이다. 정부 입찰 번역 사업은  금액이 크고, 장기적인 사업이라서 그 기간 동안 다른 번역 일을 겸할 필요가 줄어든다. 번역 납품업체는 이런 안정적인 일을 확보하기 위해 저렴한 금액을 제시한다. 전임식 실장은 “공공부문의 입찰은 최저단가로 낙찰되는 가격 경쟁이다”라며 “번역의 품질이 아닌 낮은 금액이 선정 기준이 된다”라고 말했다.

번역가의 상당수가 프리랜서 형태로 일하는 만큼, 프리랜서에 대한 처우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프리랜서 번역가는 각종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번역비는 분 당 급여로 지급되는 형태다. 하지만 임금 하한선은 정해져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초보 번역가는 경력을 쌓기 위해 낮은 단가로 일하는 경우가 있다. A 씨는 “최저 시급에 대한 법적인 규제가 필요하다”라며 “작품 당 적어도 받아야 할 최저의 금액을 정부에서 정해준다면 악덕 업체에 대해 제재를 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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