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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기다린다

닉네임
남지현
등록일
2018-05-29 16:39:10
조회수
490
‘암순응’,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가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지만 차차 보이게 된다. 망막이 어두운 곳에서 적응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어둠 속에 뛰어들었을 때, 두려움이 앞설 것이다. 하지만 시야가 곧 밝아질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둠 속에서 점차 보이게 되는 때를 기다린다. 밝아지는 그 짧은 순간만을 고대하면서.

2017년 10월, 뉴욕 타임스가 영화 제작자였던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 사실을 최초 보도한다. 이후 SNS에서는 새로운 해시태그가 떠오른다. ‘#Me too’, 이는 그의 성추문 행위를 비난하기 위한 해시태그 운동이었다. ‘나도 당했다’라는 해시태그의 규모가 확대되며, 주변에 권력형 성범죄가 얼마나 만연한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밝아지는 순간만을 기다려온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형 미투도 번지기 시작했고, 언론은 앞 다투어 권력형 성범죄 피해를 보도했다. 미투를 다룬 기사는 순식간에 모두를 구심점으로 끌어들였다. 이슈의 한 가운데에서, 분노하고 울분을 터뜨리게 했다. 그래서 어떤 언론이든 먼저 최초보도를 위해 애를 썼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부터 시작해, 연예계와 정치계까지 도미노처럼 넘어졌다. 심지어 언론사 1면이 미투 기사로만 도배되던 때가 있었다.

대학가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3월 14일, 부산대학교 학생이 예술문화영상학과 교수에게 성폭력을 당한 사실이 보도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또 다른 학생이 언어정보학과 교수의 성추행을 폭로했고, 교내 인권센터에 의해 2차 피해를 당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계속되어온 권력형 성범죄 사례의 폭로가 이어졌다. ‘부산대서 미투 폭로’, ‘부산대 미투, 2차 피해 발생’, ‘부산대 교수 제자 상습 성추행 폭로’ 등 기사제목의 공통점이 있다. 일어난 사실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의 역할은 어둠 속을 조명하는 것이 끝인 것일까. 기사를 들여다보아도 언론은 그저 이슈만 촉발했다. 문제 사실만을 보도하고, 그 뒤는 생각하지 않는다. 비판도, 대안, 방향 제시도 없다. 피해자의 자극적인 피해사실에 초점을 맞추었다. 미투 운동 이후의 상황에 대한 후속 보도가 없다.

사실 성범죄 피해들은 계속 존재해왔다. 그러나 언론이 다시 재조명을 한 것인데, 이 또한 일시적이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활발해지기 전의 언론 역할은 한정적이었다. 의제설정(agenda-setting)을 하고 틀짓기(framing)만 하면 그만이다. 즉, 특정 기사거리를 찾아내 의제를 설정하고, 하나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해나가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능은 비단 언론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파급력의 차이일 뿐이지, 판을 키우는 것은 지금 세대에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반인도 인터넷을 통해 한 사건을 공론화 시킬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언론은 문제제기와 확산에서 끝날 것이 아니다. 후속 보도를 하고, 이로 인한 점화(priming)가 일어나야 한다. 특정 주제의 이해를 넘어, 정책이나 법에 영향을 끼치게 만들 수도 있다. 사실 보도의 이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제는 물음표와 마침표만 남기고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 우리를 가리키는 조명은 계속 따라와야 한다. 어둠에 적응하게 될 때까지를 기다릴 수 없다. 한 조명이 우리를 비추고, 이것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그 빛이 우리를 계속 밝혀주기를.
작성일:2018-05-29 16:39:10 164.125.15.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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