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위적이었다. 하나의 교훈처럼 ‘소수자’를 차별하지 말고 그에 대한 혐오를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간절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심 스스로는 ‘소수자’가 아니지만 평등을 얘기하는 괜찮은 시민이라고도 여겼다. 오만했단 걸, 지난 1월 독일을 다녀오면서 깨달았다. 그곳에서 ‘독일어는 고사하고 영어도 썩 못 하는 아시아 여성’은 사회 비주류였다. 주눅 들기 일쑤였고 대부분의 일에서 막막함이 먼저 들었다. 그제야 나도 어디선가는 소수자란 걸 알았다. 그래도 당시 필자에게 믿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혹여 심각한 차별을 당하면 이렇게 말하도록 외웠다. ‘당신의 행위는 인종차별적입니다. 사과하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어요’. 그 나라에 차별금지법이 있는 덕이었다.

차별금지법은 직접적으로 차별로 손해를 입은 피해자들을 구제할 수 있다. 혐오를 당할지 모르는 공간에서 혐오에 맞서는 방패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다소 추상적인 차별과 혐오의 다양한 사례들이 수집되면서 구체적으로 토론될 수도 있다. 차별적 언행이 잘못됐다는 생각과 느낌을 더 많은 사람이 공유할 수 있을 테다. 그렇다고 차별금지법이 차별을 없애는 요술 방망이는 아니다. 결국 발언과 행동에 대한 규제라, 차별적인 생각을 없앨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도 이 법안이 필요한 건 차별 철폐의 시작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정 후 마주할 숙제가 많겠지만, 법이 있음으로 그나마 마음이 편할 것도 사실이다.

허나 차별금지법은 어언 14년째 국회를 망령처럼 떠돈다. 유엔이 입법을 권고한 지도 2년째다. 8년 전만 해도 지금 정권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그런데 5년 전 선거 공약에서 쏙 빼버리더니 정권을 잡은 후엔‘사회적 합의’를 운운했다. 그래서 유엔은 현 정부의 행동을 ‘진전 불충분’,‘시일 내 계획도 없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심지어 과거 차별금지법 제정을 찬성했던 더불어민주당 윤호중 사무총장은 최근 성소수자 문제를 ‘선거에 불필요한 소모적 논쟁’으로 취급했다. 입장이 손바닥 뒤집듯 간단히 바뀐 건‘표’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표를 줄 지도 모를 보수·기독교계의 수를 헤아려보니 소수자의 소수표보다 선거에 도움이 된다. 성소수자, 난민 같은 논쟁적 이슈는 치워버리는 게 유리하다. 그러면 선거에 이길 수 있다. 그렇게 불의는 현실로 둔갑했다.

‘사람 모두 소수인 측면과 다수인 측면을 다층적으로 쌓아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트랜스젠더 여성이 숙명여대 입학을 취소하면서 쓴 글이다. 필자도 아는 이 사실을 현 정부와 여당은 모른다. 불의를 현실이라며 동조하는 지지자들도 마찬가지다. 소수자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믿으니, 절실하지 않다. 최소한의 당위마저 걷어찼다. 무슨 기대를 더 하랴. 그런 와중 선거의 시간이 돌아온다. 그들은 바뀌지 않을 테고, 그들이 자리마저 그대로 지킨다면 지겨운 반복만 계속될 테다. 또 장외에서 오랫동안 차별금지법 제정만 외치다 4년이 지날 거 같다. 독일과 달리 여기선 믿을 구석도 없고 외울 말도 없다. 혹시나 소수성이 차별당할 일만 없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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