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의 오랑 시, 거리 곳곳에서 죽은 쥐 떼가 발견된다. 점점 증가하는 쥐의 사체와 더불어 마을 사람들도 원인 모를 죽음을 당한다. 몇몇 의사들에 의해 전염병의 실체가 밝혀지고 정부는 ‘페스트’를 선포함과 동시에 도시를 전면 봉쇄해 버린다. 대혼란에 빠진 오랑 시. 


알베르 까뮈의 소설 <페스트>는 봉쇄되어 버린 도시, 오랑을 배경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방인>과 함께 까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소설은 그를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어 주었으며, 세월이 흘러도 많은 사람이 찾아 읽고 있는 고전이 되었다. 한국에선 중고등학교 필독도서로 지정되면서 여러 독자가 이 책을 접했을 것이다.  


필자 역시 고등학교 시절, 방학 숙제를 하기 위해 이 책을 읽은 적 있다. 작은 글씨가 촘촘하게 박힌 두꺼운 책. <페스트>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삽화나 사진 한 장 없이 줄글만 빼곡하게 들어 있는, 방학 숙제용 책은 그다지 흥미를 끌어내지 못했다. 폐쇄된 마을과 전염병, 그곳에서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도 당시의 필자에겐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 시절의 필자는 좀 더 파격적이고 획기적인 것, 예상하지 못한 반전과 전개, 결말을 가진 작품에 마음을 더 빼앗기곤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은 그 후에도 지속되었다. 특히 재난 상황을 다룬 영화나 소설을 대할 때면 더 냉정하게 거리를 두게 되곤 했다. 한국형 재난블록버스터인 영화 <해운대>, <감기>, <부산행>과 같은 영화를 보면서 필자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쓰나미, 감기바이러스, 좀비들에 대항해서 최고의 과학기술과 문명기기를 사용하던 등장인물이 마지막에 가선 눈물범벅인 얼굴로 주변 사람들을 위로하고 걱정하며 염려하는 모습으로 바뀌어 맥이 빠졌다. 가족애와 인류애로 끝나는 결말이, 한국 영화 특유의 진부한 휴머니즘 같아서 시시했다. 필자에겐 외계인들이 지구를 유리구슬처럼 가지고 노는 <맨 인 블랙>이나 인류의 절반이 핑거 스냅 한 번으로 사라지는 <어벤져스>가 더 ‘재난’ 영화 같고, 더 그럴듯한 ‘서사’구조를 가진 작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최근 코로나바이러스가 대한민국 곳곳에 창궐하는 과정을 보면서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가 떠올랐다. 의사로서의 책임감과 소명 의식을 가지고 있는 리외, 취재를 위해 오랑에 왔지만 끝내 오랑에 남아 페스트 퇴치에 힘을 쏟는 랑베르, 페스트가 신의 분노라고 말하지만 마지막에는 리외의 의견을 따르게 되는 파늘루 신부가 말이다. 불의와 공포, 불안과 피로만이 남은 오랑에서 환자와 보호자, 노약자와 어린이, 그리고 나와 관계없는 시민들까지 걱정하고 보살피는 이들의 모습은 지금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지고 있었다.


코로나19로 인한 확진자 수가 늘어나고, 초·중·고·대학교의 개학이 연기되었다. 거리에선 마스크를 쓴 사람들조차 드물게 볼 수 있고, 자주 가던 음식점과 카페는 문을 닫았다. 친구들과 얼굴을 마주하며 이야기를 하거나, 맥주잔을 부딪치면서 파이팅을 외치던 게 언제인가 싶다. 황폐해져 가는 도시가 까뮈 소설의 오랑을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확진자 수가 제일 많은 대구로 자진해서 떠나는 의료진들이 있고,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써 달라고 기부금을 내는 이웃들이 있다.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겨우 구할 수 있는 일회용 마스크지만, 고령의 노약자에게 선뜻 양보하는 지인도 있다.  


<페스트>가 보여준 결말이, 진부한 휴머니즘 같은 한국형 재난 영화의 공식이 결국 현실의 나와 우리를 살리는 길이었던 것이다. 절망의 상황에서도 연대하고 투쟁하는 것, 튼튼한 지반이 마른 모래처럼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전염병과 폭력이 난무하는 이 세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는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까뮈의 소설을 다시 읽는 지금, 코로나19로 힘든 우리도 오랑 시의 인물들처럼 지금의 상황들을 잘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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