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는 산 넘어 지려 하고(白日依山盡)/ 황하는 바다로 흘러가네(黃河入海流)/ 천 리 밖 먼 곳까지 더 보려고(慾窮千里目)/ 다시 한층 누각을 더 올라가네(更上一層樓)/
당나라 시인 왕지환이 산시성 영제시에 있는 3층 관작루에 오르면서 지은 시, 등관작루(登鸛雀樓)이다. 
 
시인은 관작루에 오르기 위해 꽤 먼 길을 걸어왔을 것이다. 1층에서 보는 일몰 풍경이 아름다웠을 것이고 2층에 올라가니 1층에서 보이지 않던 황하가 멀리 보였을 것이다. 이때 시인은 약간 주저한 것 같다. 아픈 다리를 끌고 한 층을 더 올라가야 할지 아니면 돌아서야 할지. 그런데 천 리 밖 풍경이 못내 아쉬워 기어이 한 층을 더 올라갔다. 그리고 무엇을 보았을까?
이 시는 마치 학인(學人)의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1층에서 붉은 해는 관작루를 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여기까지 걸어온, ‘육신의 눈’을 가진 이는 볼 수 있다. 즉 1층은 감각과 경험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는 ‘보이는 세계’를 표상한다고 생각한다. 이곳에서는 오직 자신의 감각과 경험으로 감지할 수 있는 대상만이 존재한다고 인식된다. 이곳을 ‘감각과 경험의 세계’라 하자. 2층에 올라서면 황하는 ‘보이지만’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시인은 바다의 존재뿐만 아니라 두 존재(‘황하’와‘바다’)의 관계도 확신한다. 시인은 어떻게 바다의 존재와 이들의 관계를 인지했을까? 타인이 만든 지도를 보았거나, 타인이 쓴 책을 보았거나, 황하에서 배를 타고 바다까지 가본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거나,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자신이 추론했거나 등등이다. 자신의 감각과 경험으로 인지할 수 없고 타인의 정보(지식)를 바탕으로 자신의‘생각’을 투입되지 않으면 인식할 수 없는, 즉 ‘보이지 않는’존재의 세계이다. 이곳을 ‘지식의 세계’라 하자.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갈 때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수고를 하듯이 ‘보이는 것’만이 기준이었던 삶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삶으로 올라서려면 ‘생각하는 훈련’, 즉 ‘지적훈련’의 수고를 해야 한다. 지적훈련은 남들이 만들어낸 엄청난 지식을 기본적으로 습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왜 우리는 이것을 배워야 하는가?예컨대 독버섯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는 부족과 그렇지 못한 부족의 삶의 결과는 어떠했을까? 교환원리를 몰랐던 네안데르탈인의 운명은 우리 인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와 경쟁에서 어떠했나? 앞의 시에서 보듯이 1층에서 붉은 해밖에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과 2층에서 황하강을 보고 바다를 추론하고 둘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사람 중 누구의 삶의 양과 질이 높을까? 결국 지식은 우리의 삶의 양과 질을 높이기 위해서 존재한다. 이런 지식은 시대의 질병을 찾아내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사람들의 치열한 사유의 결과로 창출된다. 나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양과 질을 높이기 때문에 지적훈련을 받은 사람은 공적이며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다.
이런 사람은 현존하는 모든 지식은 타인이 과거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유의 결과라는 사실을 안다. 현존하는 지식은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타인이 창출한 지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우리(인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스스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낼 책무가 있다. 시대와 세상이 변하지 않는 한 배움이 멈출 수 없는 이유이다. 바로 그 현장이 대학일 것이고. 코로나19로 어수선하지만, 어김없이 올해도 새내기들은 2층을 오르기 위해 대학의 문턱을 넘었다.       
이 시는 ‘천 리 밖 먼 곳을 보려고’ 3층으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끝을 맺고 있다. 3층에 오르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의 영역으로 남겨 둔 채. ‘감각과 경험의 세계’와 ‘지식의 세계’를 뛰어넘는 어떤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이런 호기심이 이 시인을 3층으로 이끌지 않았을까. 대학이 3층의 세계를 펼치는 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곳이 우리가 모두 잘 살 수 있는 '지혜의 세계'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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