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민 (한림대 나노융합스쿨) 겸임교수

수능을 마친듯한 학생들로 붐빈 지하철에서 재잘대는 학생들의 대화가 들어왔다. 우정과 사랑, 갈등일 줄 알았는데, 대입과 취업, 집값, 심지어 최근 정치권에서 젊은이들에게 박탈감을 안겨준 사건도 그들의 대화 소재였다. 논술 때문인지 시사에 해박한 사실에 감탄하며 그네들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지만, 불안과 박탈감에 마냥 행복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그 학생들에게 ‘헤스의 법칙’을 말해주고 싶었다. 물론 지옥 같은 수능을 끝낸 아이들에게는 잔인한 조언이다.‘헤스의 법칙’은 화학 II를 선택한 학생들마저 좌절을 경험하게 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화학은 반응의 학문이고 반응에서 열은 중요하다. 열역학을 몰라도 제1 법칙은 잘 안다. 바로‘에너지 보존 법칙’이다. 지금이야 상식이지만 1800년대 초반에만도 그렇지 않았다. 당시는 열의 정체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러시아 화학자 게르마인 헨리 헤스(Germain Henri Hess)가 1840년에 열과 일에 관련한 법칙 하나를 발표했다. 이후에 이 법칙은 에너지 보존 법칙의 한 형태로‘총열량 보존 법칙’으로 불렸다. 이 법칙이 무엇일까. 예를 들어 이산화탄소(CO₂)는 탄소 원자 1개(C)에 산소 분자 1개(O₂)가 결합해서 생성된다. 이 반응에는 394kJ의 열이 발생한다. 그런데 다른 반응도 존재한다. 먼저 일산화탄소(CO)를 만들고 다시 산소와 반응해 이산화탄소를 만들 수 있다. 그러니까 다른 경로를 통해 같은 최종 도착지에 도달하는 셈이고 각각 111kJ과 283kJ의 반응열이 나온다. 두 반응열을 더해보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지 짐작할 수 있다. 물질이 반응하며 상태가 바뀌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화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최종 생성물이 같다면 반응에 관여한 에너지 총량은 같다는 것이 헤스의 법칙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아이들에게 헤스의 법칙을 말해주고 싶었을까. 삶에 대입해보면 꽤 근사하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의 인생이란 최종 목적지가 같기 때문이다. 최근 예민한 사회현상이 이념과 정치의 대립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 세대 갈등이 녹아있다. 이미 자식 세대에는 부모 세대가 분노의 상대이고 사회의 공적이다. 부동산 중심의 자산구조를 가진 586 세대에게 월세를 내며 살아가야 하는 청년 세대, 근력과 용기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 이전에 기회조차 별로 없는 세대가 느끼는 것은 희망의 부재다. 지금은 세계적으로도 부모가 살았던 시절처럼 경제적 활력도 없고, 이런 변화가 또 부모 세대의 잘못이라고 하기도 어렵기에 그들 자신도 감내하고 견뎌온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은 사회적 자원에 대한 정의로운 공정 분배를 생각해보게 한다.

지금 상황이 영화 <설국열차>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 앞칸으로 가기 위해 가열하게 투쟁하던 사람들과 소위 좋은 자리를 지키려 강력하게 버티던 사람들, 하지만 둘 다 오로지 한길로만 가고 있다. 기성세대도 수능 성적표처럼 앞칸에 있으면 행복할 줄 알았지만 늘 허기지고 빼앗길까 동동거리는 삶이다. 공정 분배 논리라면 기성세대는 앞칸을 그들에게 양보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가 모두 설국열차를 탈 필요가 있을까 하는 거다. 분명 사회는 더 좋아지겠지만 지금처럼 모두가 한 곳을 향하는 경로로는 쉽지 않아 보인다. 장점이라 여겼던 부분마저 모두 불공정한 배분이 됐고 미래사회에서 경쟁력마저 떨어졌다. 목적지로 향하는 방법은 많다. 열차에 내려도 되지 않을까. 어쩌면 돌아가는 낯선 길이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다양한 삶의 과정에서 사용되거나 내뿜는 에너지는 모두 다르지만, 삶의 풍경도 내음도 더 가까이 느끼게 되고 더 설레며 자신만의 꽃밭을 만들 수 있을 거다. 오히려 미래가 요구하는 사회 구성원은 그 다양성에서 나올 거다. 이미 선진국의 인재 채용에는 대학 졸업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헤스의 법칙을 적용해보면 결국 모든 사람의 삶의 종착지는 같으니 어떤 과정이든 에너지 총량은 같지 않을까. 누구나 타려고 하는 열차만이 정답은 아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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