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금영 

과학칼럼니스트

초등학생 때 토요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때는 학교 수업이 토요일도 있었는데, 초·중·고교 모두 오전에 수업이 끝났다. 학급 청소를 마치고 집에 오면 점심을 먹기도 바쁘게 텔레비전부터 켜고 11번 채널로 돌렸다. 그러면 “딴딴따 딴딴다~”로 이어지는 오프닝 음악과 함께 미국 드라마 <맥가이버>가 시작됐다. 

미국 ABC의 TV 시리즈로 한국에서는 1986년 11월 5일부터 1992년 8월 1일까지 MBC에서 방영됐다. 나는 그 드라마를 보기 위해 허겁지겁 뛰어왔다. 그만큼 맥가이버는 나를 설레게 했다. 드라마는 비밀임무를 수행하는 피닉스재단 소속 첩보원 맥가이버의 활약상을 보여준다. 요즘 TV나 영화에 등장하는 첩보원과 달리 맥가이버는 총을 두려워했다. 

이 때문에 그는 검은 정장이나 군복이 아니라 뒷머리를 조금 기른 채 가죽점퍼를 입었다. 여기에 맥가이버의 ‘빅토리녹스 칼’(일명 맥가이버칼)과 은색의 ‘덕트 테이프’를 지니면 된다. 이것으로 범죄집단에 들어가 음모를 파헤치고 위기에 처한 지인을 구출해 내기 위한 준비가 완벽하다. 필요한 것은 그가 지닌 물리, 화학 같은 과학지식과 주변의 생활용품을 창의적으로 조합해 내는 일이다. 

예를 들면 비료로 폭탄을 만들거나 창고의 밀가루를 폭발시켜 납치된 곳에서 탈출한다. 또 차량 밑에 달린 소음기를 떼어내 구부리고 기름을 붓은 뒤 화장지로 심지를 만들어 붙이면 발사 거리는 짧지만 쓸만한 대포가 된다. 그리고 자동차에서 삼각뿔 모양의 헤드라이트를 떼어내 장전한 뒤 추격해 오는 차량을 명중시킨다. 

이처럼 맥가이버는 ‘모범생’보다 ‘모험생’에 가깝고,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하는 ‘책 똑똑이’보다 거리에서 산전수전을 경험한 ‘생활 해결사’의 모습이었다. 나는 대학에서 물리나 화학, 기계공학, 재료공학 등을 공부하면 누구나 맥가이버처럼 완성된 제품을 사지 않아도 그때그때 집에 있는 재료와 생활용품을 조합해 필요한 무엇인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창의적인 과학자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반면 오늘날 이공계 학과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자신에게서 맥가이버의 모습을 상상이나 할까?인생의 선배로서 과학자를 꿈꾸며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아니라 취업을 꿈꾸며 대학에 진학하는 후배들의 인생이 짠하다. 얼마 전 한 후배에게 전기·전자공학, 화학공학, 기계공학과가 취업률이 높아 학과의 앞글자만 따서 ‘전화기’ 학과가 인기라고 들었다. 

최근에는 4차 산업혁명 기반기술인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센싱기술 △인공지능과 연관된 컴퓨터학과의 인기가 더해져 ‘전화기컴’으로 변화하는 추세라고 한다. 반대로 취업이 잘 안되는 문학, 사회학, 철학과를 모아 ‘문사철’이라고 부르는데, 문과생들이 취업이 잘 되기 위해 이공계 학과를 이중전공이나 복수 전공한다고 했다. 

어린 시절 <맥가이버> 시청이 끝나면 나는 어머니를 졸라 문방구에서 1,000~2,000원 정도 하는 조립식 장난감을 샀다. 설명서를 보면 장난감을 조립하고 분해하는 일이 재미있었다. 6학년에 올라 집에 있던 라디오를 분해했다. 아직 트랜지스터와 PCB 회로 등을 배운 단계는 아니어서 케이스만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하는 수준이었다. 중학교에 진학해 마침내 조립식 라디오 키트를 사서 납땜을 하며 나만의 라디오를 손수 만들었다. 

최근 미국에서는 허리케인, 폭풍, 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빈번해지면서 구급 의료용품과 손전등과 함께 라디오 키트의 판매량이 늘었다. 만약 우리나라에 지진이나 해일로 인해 쓰나미가 몰아닥쳐 통신이 끊기고 고립된다면 우리는 재난방송을 들을 수 있는 라디오를 조립할 수 있을까?모범생에게 대입문제와 취업문제는 손쉽게 풀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인생의 여러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이 순간 대한민국의 현실은 청소년과 대학생들이 과학을 일상의 삶으로 받아들이기 녹록지 않다. 오로지 입시와 취업을 위한 도구로 과학기술의 위상이 떨어졌다. 과학기술을 배우고도 생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한반도를 삼킬 재난이 우리를 향해 더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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