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현정 편집국장
feliz_ing@pusan.ac.kr

노동자는 존엄할 수 없다. 살고자 ‘버티기’를 한 노동자에겐 죽음만 있을 뿐이니, 이들의 목숨이 존엄하다고 말하기엔 어폐가 있다. 한국 노동시장엔 예정된 죽음이 있다. 하청 노동자의 죽음이다. 비정상적인 노동구조에서 안전을 고려 받지 못한 채 높은 곳에선 또 낮은 곳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노동자가 죽는 이 서사는 최근 급속도로 증가하는 퇴사와도 닮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바뀌지 않는 노동 처우에 불안과 불만이 겹겹이 쌓인다. 최후 보루로 끝내 퇴사를 선택한다. 최후 보루가 거창하게 들리지만 극한의 상황에서 어쩌지 못해 결정한 ‘기피’다. 퇴사와 죽음을 만드는 이 익숙한 서사. 사회 구조 속에서 내몰리는 사람들의 슬픈 차선책이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자에게 안전 혹은 권리라는 선택지는 없다. 이들에게 정해진 답은 죽음 혹은 퇴사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대기업이 이윤을 독점하고 있는 한국 노동시장 체제 때문이다. 실제로 대기업이 우세하게 차지하고 있는 산업분야에는 영세·중소기업이 대기업의 하청으로 있다. 대기업은 위험한 업무의 사고책임을 회피하고 이윤을 독식하기 위해 하청업체를 두는데, 여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안전을 책임질 기관이 부재한 것이다. 이러한 체제에서 노동자는 최소한의 안전과 처우를 보장받지 못한다. 결국 내 자리를 지켜내고자 버티기를 한 노동자들은 죽어나간다. 대기업의 이윤 추구는 또 다른 노동자들을 괴롭힌다. 임금을 낮추기 위해 파견직이나 파트타임직 등 비정규직 직급체계를 만들었다. 이러한 이중노동구조 속에서 부당한 처우를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거대한 노동구조에 대항할 수 없어 결국 퇴사를 택한다.

불합리한 한국 노동시장 체제는 성장지상주의에서 비롯된다.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으로 경제 성장이 뒤처질 수밖에 없던 한국은 경제성장을 위해 밤낮없이 일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고속도로를 지으며 77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한국은 한강의 기적이고 숭고한 죽음이라고 자축했다. 과도한 성장이 목표인 이들에게 누군가의 죽음은 성공을 위한 거름일 뿐이다. 이러한 목적을 향한 성장지상주의 가치관은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와 사람들에게 스며들었다. 기업은 개인 생명의 가치와 권리 신장에 앞서기보단 기업의 성장과 이윤이라는 목적 추구를 위해 움직였다. 성장은 인간보다 위에 있고, 노동자의 최소한의 노동권과 안전은 뒷전이었다.

사회는 바뀌기 어렵다. 하지만 필자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의 시작이라 믿고 싶다. ‘더 이상 죽이지 마라’고 외치는 부산 뮤지션들의 연대, 광화문 시장에서 노동자 1만여 명이 ‘죽음의 외주화 멈춰 달라’고 외치는 노동자집회, 청와대 앞에서 죽음의 외주화를 막기 위해 법 제도화를 하자는 위험의 외주화 금지 대책 위원회 등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전국 곳곳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회는 연대하고 있는 중이다. 필자도 다른 사람들이 연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스레 가슴이 울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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