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아

(성결대 연극영화학) 교수

 

지난 가을 시즌 극장가는 여성감독, 여성서사 영화의 계절이었다. 비록 독립영화에 한정되기는 했지만, 주류 상업영화가 남자 주인공들의 액션과 스릴러로 채워지고 있는 지금, 독립영화계는 여성감독들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모양새다. 윤가은의 <우리집>, 김보라의 <벌새>, 유은정의 <밤의 문이 열린다>, 한가람의 <아워 바디>, 이옥섭의 <메기> 등 여성 주인공의 성장 서사에서 장르적 세계로 확장된 여성의 이야기까지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한 여성감독들의 여성영화가 한국영화계를 보다 풍성하게 하고 있다.한편 아쉬운 점은 여성영화인들이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말 괜찮은 여성 미스터리 스릴러 <비밀은 없다>(2015)가 처참한 흥행 참패를 맛본 후, 여성관객은 나서서 여성감독의 여성서사 영화를 밀어주기로 약속이나 한 듯, 몇몇 기이한 현상이 영화계에 일어나고 있다. ‘미투 현상’이 있었고, 여혐 논쟁이 활발했고, 대중문화와 일상에서 여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이러한 움직임은 그 동안 오랫동안 참아왔던 인내심이 분출한 결과다.  

2000년대 이후 스크린에서 여성 주인공은 사라져갔고, 주류영화에서 여자의 로맨스와 연애는 시답잖은 것으로 취급됐다. 주류 상업영화에서 여성들은 아픈 아내, 룸살롱 마담, 범죄의 희생양, 미숙한 동료로 등장하기 일쑤였다. 남자들의 역사는 룸살롱에서 이루어지고, 접대부와의 동영상이 협박의 만능키로 작용하며, 딸은 울고 있고, 아내와의 감정적 교류는 차단되어 있다. 이런 영화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심드렁해진 여성관객들은 영화의 성 차별 현상을 지적하기 위해 고안된 ‘벡델 테스트’를 적용하여 영화를 찾아다니면서 적극적으로 소비하기 시작했다. 제작의 주체가 되지 못하면 소비의 주체가 되리라는 마음가짐으로 나서서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조용히 개봉해서 막을 내릴 뻔한 여성감독의 <미쓰백>(2018)을 살려내었다. 그리고 여성 투탑 영화인 <걸캅스>(2019)가 흥행해야 여성 주인공 영화가 계속 만들어진다는 사명감으로 ‘영혼보내기’ 운동을 펼쳤다. 유난스럽게도 보이는 이런 운동이 있었기에 여성감독들의 영화가 의미있는 상영을 넘어 흥행도 가능하다는 것을 철저한 상업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영화산업도 보고 있는 것이다.  

이제 21세기 대중문화 페미니즘의 상징과도 같은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영화화가 이루어졌고 곧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그 전에 로맨틱 코미디 <가장 보통의 연애>가 실로 로맨스 영화로서 흥행 중에 있다. 논쟁의 중심에 놓였던 <82년생 김지영> 상영과 함께 또 한 번의 젠더 대결 양상이 벌어지지 않으면 좋겠다. 이 영화를 영화적 퀄리티와 의미에서 보며 균형감 있는 토론이 오가길 기대한다. 애써 어렵게 축적한 여성영화인의 열린 공간이 이 영화 한편으로 어찌 되지는 않겠지만, 많은 기대감을 받은 영화이니만큼 아쉬운 점이 크게 다가온다. 

<비밀은 없다>, <벌새>, <소공녀> 같은 영화들이 만들어낸 입체적인 인물, 즉 정의롭지만 때론 적당히 타협하기도 하고, 어쩔 땐 악당 같지만 일상 속에서 스스로 교훈을 찾아가는, 그런 다이내믹한 쎈 여성들은 많은 공감과 성찰을 이끌어 내었다. 단조로운 김지영의 환경 때문인가, 사건 속에서 추락하고, 교훈을 얻고, 스스로 일을 만들어내고, 그리하여 변화하는 그런 입체적인 인물형은 아니다. 이리저리 치이고, 인정받지 못한 보통 여성 김지영의 내면이 공감을 자아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영화가 이런 평면적인 인물에 호응할 만큼 그리 세련되지 못한 산업은 아니다.  <가장 보통의 연애>를 보자면,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은 매우 중요한 문제고, 이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스스로 판단하는 여성 캐릭터는 멋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영화에서 여성이 연애 말고 보다 더 멋진 일을 위해 자신을 걸 때 더욱 많은 여성들이 해방감을 느낄 것이다. 

독립영화의 여성들만큼 성큼 나아가지 못한 주류 상업영화의 여성들로 인해 가슴이 답답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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