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밥통’이란 말은 흔히 비난조로 사용되지만 사실 자기 밥통이 유리 밥통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대학교수들의 밥통도 철밥통이다. 교수들은 주당 책임 수업시수가 정해져 있지만 지키지 않는 교수들이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이런저런 불이익을 주기도 하고 대학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주기도 한다. 그런데 그 결과 수업을 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학생들한테는 더 좋은 교수들마저 수업을 자꾸 하게 되었고, 수년에 걸친 장기간의 연구에 몰두하기 위해 수업을 적게 했던 교수들조차 어쩔 수 없이 수업을 더 많이 할 수밖에 없는 피해도 생겨났다.

많은 사람들이 교수들의 철밥통을 깨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기술도 자본도 자원도 없는 나라였고, 있는 건 몸뚱어리뿐이니 이 몸을 산업사회에서 일하는 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이 중요했다. 헌법 제31조에서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1976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는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비판적 교수들을 탄압하기 위해 교수 재임용제를 신설하였고, 1977년에는 젊은 교수들의 재갈을 물리기 위해 강사의 교원 지위를 박탈하였다. 교수 재임용제는 현재 계약임용제로 사정이 더 나빠졌지만, 20여 명의 대학 강사들의 자살과 지난한 투쟁에 의해 2019년 강사의 교원 지위가 회복되었다.

대학 강사도 이제는 교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원은 동시에 교육 공무원이기도 하여 교원의 권리와 교육공무원의 권리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강사는 교원이기는 하나 교육공무원이 아니기에 어떠한 권리를 갖는지가 분명하지 않아 혼란이 계속될 것이다. 대학은 이러한 혼란을 하나씩 정리해 나가야 할 것인데, 교육부나 국회에서 해 주기를 기다리는 것은 대학의 자율성을 스스로 반납하는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지식인의 자세도 아니다. 근대사회는 인간으로서 반드시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기본권으로 정하고 있는데, 대학에서도 인간의 기본권에 해당할만한 권리를 먼저 강사의 권리로 보장해야 할 것이다.

기본권에는 다양한 종류의 권리가 포함되지만, 무엇보다 대학은 강사의 존엄과 가치를 해쳐서는 안 되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인류의 역사는 이러한 포괄적인 기본권의 보장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참정권이었음을 보여준다. 강사들도 총장 선거권을 가져야 하고, 평의회와 교수회, 각종 교육과정위원회 등 학내의 다양한 의사결정기구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나 보다. 우리는 이미 동물들한테도 권리를 부여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놀고먹는 대학교수는 용서가 될 수 있어도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한다.

대학 구성원들 모두가 구성원 모두의 권리를 지키려 노력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곳을 대학 공동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전임교원과 학생들의 각성이 있어야 한다. 강사 자신의 자각이 가장 중요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학은 사회 어느 곳보다 민주적인 공간이어야 한다. 그럴 때 사회는 더 민주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에 더 많은 자유와 권리를 법률로 보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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