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응천<문사철> 대표

10월 26일은 매년 반복되는 날이지만, 한국 근현대사에는 특별히 기억되는 10월 26일이 두 번 있었다. 1909년의 10월 26일과 1979년의 10월 26일이다. 첫 번째 10·26은 일제의 초대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 두 번째 10·26은 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박정희의 죽음을 목격했다. 두 사람의 죽음은 엄청난 역사적 파장을 몰아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두 사람을 쏜 사람들이 전혀 다른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경 한국인 청년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68세의 일본인 노정객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던 이토와 약 5m 떨어진 곳에서 브라우닝 권총으로 발사한 세 발의 총탄은 정확히 급소를 관통했다. 안중근은 이토의 수행원들을 향해 세 발을 더 발사한 뒤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고 외친 뒤 러시아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당시는 러·일전쟁이 끝난 지 4년째 되는 해였다. 아시아인에게 러·일전쟁은 동양의 평화를 위협하는 서구 제국주의와 동양의 작은 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안중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일본이 러시아를 물리쳐 동양 평화를 공고히 하고 한국의 독립을 지켜주기를 바랐다. 그의 바람대로 일본이 승리하자 아시아 각국의 지도자들은 환호했다. 인도의 독립운동가 자와할랄 네루는 영국 유학 중에 날아갈 듯한 기분을 느꼈고, 런던에서 귀국하던 중국의 국부 쑨원도 그를 일본인으로 오해한 아랍인 노동자로부터 축하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러·일전쟁 직후 일본은 한국에 을사조약을 강요해 외교권을 박탈하고 침략자의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 중심에는 을사조약 후 설치된 통감부의 초대 수장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다.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는 동양의 수호신으로 여겨졌던 일본은 또 다른 제국주의였을 뿐이다. 안중근은 배신감을 느끼고 항일투쟁의 길에 올랐다. 러시아에서 국권 회복 운동을 하던 중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안중근은 그를 처단하고 일본의 정체를 만천하에 알리겠다고 결심했다. 하얼빈의 총성은 네루, 쑨원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에게 던지는 사자후였다. 당신들은 속았소! 일본은 또 다른 제국주의 침략자일 뿐이오!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1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서울 궁정동의 안가에서 자신이 모시던 대통령 박정희를 쏘았다. 발터 PPK의 총탄은 가슴을, 스미스앤웨슨 리볼버의 총탄은 머리를 뚫었다. 박정희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사망했고, 사건 현장에 있던 김계원 비서실장은 최규하 국무총리에게 김재규가 범인임을 알렸다. 김재규는 이튿날 새벽 0시 40분경 체포되어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취조를 받은 뒤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당시 유신 정권은 국민의 입과 귀를 틀어막으며 극단적인 독재로 치닫고 있었고, 국민은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항쟁으로 응답했다. 박정희는 이성을 잃고 국민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김재규는 파국을 막기 위해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군법회의에서 진술했다.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김재규는 1980년 5월 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김재규가 서슬 퍼런 군부독재의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제가 안중근의 처형을 얼마나 서둘렀는지 알 수 있다. 안중근 사후 한국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안중근의 뜻을 이어받은 애국지사들이 희생을 거듭한 끝에 독립을 되찾았다. 지금도 안중근은 한국인에게 항일정신의 화신으로 기억되고 있다. 김재규 사후 한국은 또 다른 독재자 밑에서 신음했지만, 민주투사들의 숱한 희생 끝에 민주화를 이룩했다. 그러나 오늘의 민주주의를 김재규에게 빚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하얼빈의 의거는 이천만 동포의 뜻을 대변한 고귀한 희생이었던 반면, 궁정동의 총성은 국민적 저항에 직면한 독재정권 내부의 파열음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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