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응천 <문사철> 대표

2015년에 인기를 끈 영화 <암살>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간도 한인 학살의 주범 가와구치 마모루와 악질 친일파 강인국을 암살하러 떠나는 독립군 황덕삼이 김원봉에게 묻는다.‘피치 못할 땐 민간인 죽여도 됩니까?’김원봉은 단호하게 대답한다. ‘안 된다’그러자 황덕삼이 덧붙여 묻는다. ‘일본 민간인은요?’김원봉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힘주어 대답한다.‘모든 민간인은 죄가 없지. 그냥 총알에도 눈이 있다고 생각하자고’
 

이 장면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감독의 의도는 읽을 수 있다. 김구의 한인 애국단, 김원봉의 의열단 등을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매도하는 일본과 국내 뉴라이트 계열의 왜곡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영화 속 김원봉의 말이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실제 신념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역사적 근거가 있다. 한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칠가살(七可殺, 죽여도 되는 일곱 부류) 가운데 ‘일본인’을 으뜸으로 꼽았다는 정보가 인터넷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나 1920년 2월 5일자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1면은 일본인 가운데 총독, 정무 총감, 헌병경찰 등을 가리키는  ‘적괴(賊魁)’를 칠가살의 첫 번째로 꼽고 있다. 모든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 침략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특정한 것이다. 
 

이처럼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인이라 하더라도 무고한 민간인은 처단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들의 독립운동이 숭고한 인간해방의 대의에 복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일제 침략자들은 간도 참변이나 난징 대학살 같은 민간인 살육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사람값’은 식민 통치의 가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올해 일본 정부의 경제보복에 대한 한국인의 대응 과정에서 독립운동가들의 고귀한 항일정신이 재연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지난 8월 5일 서울 중구청은 ‘노 / 보이콧 재팬 / 가지 않습니다 / 사지 않습니다’ 문구가 적힌 깃발을 태극기와 함께 외국인 관광객들이 오가는 명동과 청계천 길가에 걸겠다고 밝혔다. 이는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던 일본 제품 불매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중구청의 계획에 일부 시민단체가 반기를 들었다. 중구청 깃발이 한국을 찾은 관광객에게 불안감을 조성할 우려가 있고, 관이 시민들의 자발적인 불매운동에 개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나아가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침략적인 아베 정권이지 다수의 민간 일본인이 아니라는 비판도 나왔다. 서양호 중구청장은 이 같은 비판을 수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배너기 게첩이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을 동일시해 일본 국민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줄 수 있다는 우려와 불매운동을 국민의 자발적 영역으로 남겨둬야 한다는 비판에 대해 겸허히 받아들인다’
 

이 논란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한 한국인의 대응은 일본과 일본 국민이 아니라 아베 정권을 정확히 겨냥하게 되었다. 8월 15일 광복절 74주년을 맞아 750여 개 시민단체로 꾸려진 아베규탄시민행동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역사 왜곡 경제침탈 평화위협 아베 규탄 및 정의 평화 실현을 위한 제5차 범국민 촛불 문화제’를 열었다. 그날은 오전부터 낮까지 세찬 비가 내렸다. 비는 다행히 오후부터 주춤해져서 문화제가 시작될 무렵 그쳤다. 우비를 입고 광화문 광장을 찾았던 시민들이 우비를 벗자 그 안에 가려졌던 티셔츠의 문구가 드러났다. 그것은 ‘NO 재팬’이 아니라 ‘NO 아베’였다. 촛불은 비가 그친 도심의 하늘을 더 환하게 밝혔다. 
 

현대 한국의 성숙한 시민들은 무고한 일본 민간인이 아니라 침략의 원흉과 집행인들을 정확히 겨눈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항일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한 모습은 100년이 넘도록 대립과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일관계에서 다수의 한국인이 대의와 도덕성을 견지하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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