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규진 

(서울교육대 윤리교육) 교수

 

요즘 대한민국 외교가가 계속 시끄럽다. ‘회담 자리에 구겨진 태극기를 내걸었다’ ‘발틱 국가를 발칸 국가라고 했다’ 등의 실수가 입방아에 오르는가 하면, 외교관이 한미 정상의 통화 내용을 정치인에게 누설하는 일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를 두고 ‘국가적 수치이고 국익의 손실이다’와 ‘그 정도 일로 뭘 그러느냐’의 목소리가 진영을 번갈아 가며 나오고 있다.

사실 외교관은 중대한 임무를 맡고 있으므로 완벽을 추구할 필요가 있지만, 그 역시 사람인지라 실수나 비리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래도 중요한 사안은 상부의 지침을 받고 움직이기 마련이므로 나라가 들썩일 정도의 실수나 비리가 외교관 개인의 손에서 나오기란 드물다. 그래도 가끔, 특히 매스컴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에는 그런 일도 일어났었다.

1867년, 청나라는 두 차례의 아편전쟁으로 한껏 높았던 콧대가 주저앉아, 서양의 기술을 배우자는 ‘양무운동’이 일어나던 때였다. 서양인의 ‘기술’가운데는 외교술도 있었다. 그래서 중국 당국은 서양 각국에 보낼 외교 대표로 미국인 버링검을 임명했다. 버링검은 ‘중요한 국익에 관련된 사안은 동행한 청나라 관리와 상의하고, 다시 본국에 보고해 결정을 기다릴 것’이라는 훈령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를 ‘자랑스러운 미국인이자 백인’이라고 여기고 있던 버링검은 1868년 미국의 슈워드 국무장관과 제멋대로 <버링검 조약>을 체결했고, 이에 따라 청나라는 자국민들이 미국에 노예노동자로 팔려나가는 일을 막지 못하게 됐다. 또 중국 땅에 미국인들이 학교를 세우려 하면 어디든 마음대로 세울 수 있도록 해줘야 했다. 이는 분명 버링검의 월권이며 중대한 범죄였지만, 무력했던 청나라는 결국 이 조약을 승인하고 말았다. 

버링검은 외국인이라서 그랬다 치고, 보다 앞선 명나라때는 중국인 외교관이 상부를 속이고 외교를 농단했다. 바로 임진왜란에서 정유재란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명나라 △조선 △일본을 오가며 세 나라의 지도자들을 속여넘긴 심유경이다. 그는 전쟁을 끝낼 협상을 하러 일본에 갔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의 절반을 할양하고, 명나라의 공주를 첩으로 보내라”는 등의 요구를 해 난처해졌다. 그때 일본 내 주화파였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어차피 칸바쿠(도요토미)는 노환으로 오래 못 사니 잠시 눈을 속이면서 시간을 끌다 보면 저절로 해결되지 않겠느냐”고 설득함에 따라 그는 명나라 황제에게 “도요토미를 일본 왕으로 봉해 준다면 전쟁을 하지 않겠다 하옵니다”고 거짓 보고했다. 일본은 허수아비일망정 ‘천황’이라 불리는 왕을 받드는 나라였기에 이는 도요토미의 요구만큼이나 황당한 요구일 수 있었는데, 어차피 일본의 최고 실권자인데 왕의 명호를 주는 건 쉽다고 여긴 명나라가 우호적으로 나옴으로써 한때는 다 잘 해결될 것 같았다. 그러나 명나라의 칙서를 가짜로 보고하기로 한 통역사가 곧이곧대로 전달하는 바람에 도요토미는 노발대발했고, 정유재란이 벌어지고야 만다. 심유경도 이후 명나라 황제 앞에 끌려가 황제를 속인 죄로 처형되고 만다.

그래도 심유경은 ‘전쟁을 막아보려 그랬다’는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겠지만, 외교관의 항명적 독단이 비극을 가져왔던 일도 있다. 조선 광해군대의 정충신은 무신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외교통이기도 했다. 만주를 여러 차례 방문하며 외교활동을 해서 오늘날 ‘광해군 중립외교의 일등 공신’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일등 공신이 기가 막힌 행동을 한 적이 있다. 다가오는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조선의 입장을 분명히 하라는 후금의 요구에 그가 대표 사신으로 보내졌는데, 광해군은 “최대한 유화적으로 대하시오. 우리는 싸울 힘도 뜻도 없다 하시오”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한 정충신은 “명나라는 부모의 나라요. 우리 조선은 죽어도 명나라를 배신할 수 없소”라며 선전포고와 같은 말을 던졌던 것이다. 격분한 후금 지도부는 얼마 후 광해군까지 실각하자 조선부터 쳐야 후환이 없다며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민주국가의 외교관은 ‘개인보다 국익을 우선’이라는 원칙 말고도 고민할 점이 있다. 바로 인권과 같은 국익을 초월한 가치다. 이라크 전쟁의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가 없었음을 폭로하고 자리에서 물러난 미국 외교관의 이야기도 그런 고민과 관련있다. 어느 때 못지않게 외교관들의 활약과 분발이 기대되는 요즘, 우리에게는 어떤 외교관들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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