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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말 ‘해’하지 않는 사이일까
  • 선인혜(문헌정보학 18)
  • 승인 2019.05.11 21:54
  • 호수 1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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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책의 설명이나 서평을 보고 나면 벌써 주제를 다 알 것만 같고 이미 충만한 여운이 느껴지는 편이다. 호기심이 금방 들끓고 금방 식는 것이다. 그런 내가 책을 집어 든다면 그 책은 무언가 다른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작 <쇼코의 미소>가 그랬다. <내게 무해한 사람>은 최은영 작가의 후속작이라서 나에게 익숙했다. 물론 <쇼코의 미소>로 큰 관심을 끈 최은영 작가지만 후속작에 대한 보장은 없다.

그러나 <내게 무해한 사람>은 기대를 만족시켰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제목이다. ‘내가 미치도록 사랑한 사람’, ‘내가 되고 싶은 사람’, ‘나에게 고마운 사람’ 같은 제목이었다면 아무래도 뻔했을 것이다. ‘무해’하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 확 다가오는 이미지가 없어서 곱씹어 생각해보게 한다. 사무적인 관계를 말하는 걸까? 연인을 묘사하는 말일까? 무해한 관계라는 것은 좋은 관계란 말인가? 나쁜 관계란 말인가? 그리고 그런 관계가 가능한가? 표지 디자인은 깨끗한 노란 바탕에 바다를 바라보는 여인의 뒷모습이 담겨있다. 뭔가 몽글몽글한 로맨스 소설일 것 같기도 하고... ‘무해함’은 그렇게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내게 무해한 사람>은 7개의 중단편 소설들을 묶은 소설 모음집이다. 사실은 처음 제목을 보고 이 책이 자신이 편한 사람만 골라 사귀고 싶은 현대인의 욕구를 반영한 소설이 아닐까 추측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사회과학적 관점이기보다는 그저 사랑에 대한 소설이었다. 작가의 인터뷰 중 이런 말이 있다. “무해한 사람은 약한 사람을 의미하고, 상대방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약해질 수밖에 없는 사랑의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다만, 이 책은 단순한 연애 감정 그 이상의 사랑을 담았다. 최은영 작가의 작품 중 간판 격인 전작, <쇼코의 미소>는 두 여성의 잔잔하고 여운 짙은(어쩌면 파격적인) 서사가 포인트였다. 그 감성을 이어 이번에도 작가는 ‘마음이 특별히 약해서 쉽게 부서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한다. 주인공들로 주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성을 선정한 것은 그 목적에 부합하는 좋은 선택이었다. 여학생들의 섬세한 정서적 교류와 서운함의 묘사, 드러나지 않는 가정폭력의 아픔, 자매간의 특별한 애증, 세 명 안에서 내가 2+1의 1이라고 느끼는 소외감 등 누군가는 사소한 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아픔이 되는 스토리를 담아내기에 충분했다. 인터뷰에서 작가는 의도한 바는 아니라고 밝혔지만, 어쩌다 보니‘관계’에 관한 책인 것이다.

‘관계’에 초점을 두고 봤을 때, 7개의 단편 중 가장 다양한 양상의 사람과 사람 사이의 비틀림을 묘사한 작품은 ‘모래로 지은 집’이다. 글쓰기 동아리에서 만난 두 여자와 한 남자의 이야기로 유일하게 남자 주인공의 비중이 높기도 하다. 세 명 안에서도 두 명이 일대일로 갖는 관계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삐걱댄다. 그 불안한 관계조차도 나이를 먹음에 따라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마치 내가 직접 겪는 것처럼 씁쓸하다. 상대가 해롭다고 착각한 사람, 자신이 무해하다고 착각한 사람 등 인물별로 다르게 설정된 콤플렉스는 모두 호소력 있다. 비뚤어진 사람이 자신의 불쌍함을 과시함으로써 상대에게 해를 입히는 장면과 뒤따르는 독백의 묘사는 절정이다.

보통의 소설 모음집들은 가장 대표적인 단편소설의 제목을 전체 제목으로 삼는 경향이 있는데, 독특하게도 이 책에는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는 제목의 단편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을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고 지은 것은 정말 탁월했다. ‘무해함’은 최은영 작가 특유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하면서, 7편의 각기 다른 소설들을 꿰뚫는 공통된 정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단편들을 일정한 관점에서 읽어내기에 좋다. 7편의 소설을 읽고도 한 편의 소설을 읽은 것 같은 통일감은 이 책의 정체성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

이 책은 대중 미디어 속 화려하고 잘난 사람들의 이상적인 인간관계를 다루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조건 좋은 남녀들의 완벽한 연애 각본에 질려버린 사람들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책일 것이다. 그간 나와 너를 ‘다그치는’ 자기개발이 주류를 차지해 왔던 출판계에 부는 힐링 열풍으로 미루어 보아, 지금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감과 위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감의 힘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부터다. 사람들은 아직도 목마르다.

사람들은 약자와 패배자의 서사를 통해 위로받고 싶어 한다. 더불어 최은영 작가의 특징인 약자 감성, 소외된 감성, 쓸쓸하고 아름다운 서사는 누구나 공감하기 쉽다. 공감은 곧 치유다. 나는 강자의 서사가 주는 판타지보다는 약자의 서사가 주는 치유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보여주는 사랑의 약자의 모습은 그 치유의 역할을 충분히 해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필요하다. <내게 무해한 사람>은 관계의 크고 작은 아픔들을 아주 섬세한 눈길로 들여다보고, 우리에게 위로를 전하는 가장 트렌디한 책이다.

선인혜(문헌정보학 18)  press@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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