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아이> (감독 신동석| 2017)

‘걔 맞잖아. 은찬이 죽인 애’. ‘당신도 알잖아. 걔 잘못 없는 거’. 성철(최무성 분)과 미숙(김여진 분)의 아들 은찬은 기현(성유빈 분)을 구하다 숨졌다. 성철은 원망스럽지만 ‘잘못’은 없는 기현을 감싼다. 그런데, 걔 ‘잘못’이 있다면? 의사자인 줄 알았던 아들은 또래 친구들의 장난으로 숨졌고, 이를 숨기고 거짓말한 사람이 자신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면? 영화 <살아남은 아이>는 묻는다. 그를 용서할 수 있는가.

성철은 물놀이에서 친구를 구하고 죽은 은찬의 존재를 세상에 남기기 위해 분주하다. 의사자 등록을 위한 서류를 준비하고, 학교에 방문해 보상금 전액을 장학재단에 기부한다. 그와 달리 미숙은 은찬을 떠나보낸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의사자 증서도, 보상금도, 증서 전달식이 끝나고 일이 잘 마무리됐다는 이웃의 위로도 다 거북하다. 그런 와중 기현이 부부 앞에 나타난다. 미숙은 아들 대신 살아남은 기현이 밉고, 기현은 살아남았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둘 다 은찬의 죽음에 상처받은 처지. 산 사람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마음을 열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다. 그렇게 그들은 슬픔을 이겨내는 것만 같았다. ‘은찬이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잖아요’. 기현이 이 말을 하기 전까지는. 

기현의 고백으로 영화의 분위기는 반전된다. 기현의 마음속 양심 혹은 죄책감은, 그런 거짓 관계는 계속될 수 없다고 진실을 토해내도록 한다. 아가리를 벌리고 있던 진실은 그대로 가족을 집어삼켜 나락으로 떨어트린다. 그렇다고 성철, 미숙은 기현을 무작정 미워하지도 못한다. 그간 같이 보낸 시간이 추억이면서 서로에게 상처로 남아버렸기 때문이다. 기현은 오롯된 원망의 대상이 될 수 없게 됐고, 그들의 감정은 향할 곳을 잃는다.

영화는 용서가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 문제인지를 논한다. 부부가 입은 ‘상처’는 과거에 그치지 않고 현재마저 옭아매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기현과 보낸 시간을 저버리지 못하면서도, 그를 쉽사리 용서할 수 없다. 기현을 용서한다는 것은 가슴에 찔린 칼을 스스로 빼내고 남은 상처, 흉터도 감당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용서를 말한다. 영화의 마지막, 기현은 자신의 죄를 짊어지는 것 마냥 은찬이 숨진 강가에서 주머니에 가득 돌을 넣고 물에 뛰어든다. 급히 달려온 미숙과 성철이 그를 구한다. 물속에서 끌려 나오면서 기현의 주머니 속 돌이 하나씩 바닥에 떨어진다. 마치 성철과 미숙이 기현을 용서해 기현이 그의 죄에서 벗어난 것처럼 말이다. 성철과 미숙을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들은 어떻게 기현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 <용서라는 고통>의 저자 스티븐 체리 교수신부가 한 말을 빌려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용서는 새로운 나,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새로운 방법이다. 용서는 상처와 피해를 묵과하지 않는다. 잔인한 진실을 더 넓은 목적과 현실이라는 맥락 안에서 숙고한다. 상처를 잊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기억이 남은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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