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규진 서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우리 핵무기를 모조리 없애버리겠소!’   

‘우리도 그만큼 하겠습니다!’

2019년 2월 28일,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과 미국 대통령 트럼프 사이에서는 이런 열띤 외침이 오갔다. 그리하여 북핵 위기는 말끔히 사라지고, 북한은 제재를 벗어남과 동시에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라면 좋겠지만, 이 장면은 아쉽게도 하노이 정상회담의 장면이 아니다. 1986년 10월 11일,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에서 만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과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냉전 시대 두 대표 국가의 정상들이 만나 격론 끝에 내뱉었던 외침이다.

그리고 그나마도 외침으로만 끝났다. 세계가 일찌감치 핵의 공포에서 벗어날 뻔했던 기회는 아쉽게 무산됐다. 관건은 미국이 추진하고 있던 전략방위구상(SDI) 철폐 문제였다. 미국으로 날아오는 전략핵무기를 차단하는 이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소련은 미국에 대항할 힘이 사라진다. 여러 미군기지에 둘러싸인 소련과 달리, 두 대양을 두고 떨어져 있는 미국을 공격하거나 보복할 수단은 전략핵무기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르바초프는 상호 핵 군축을 주장하면서 SDI만은 반드시 취소해야 한다고 해왔는데, 자신의 대선 공약이기도 했던 그것을 레이건은 끝내 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레이캬비크에서 ‘완전한 상호 핵군축, 지구상에서 핵무기를 모두 없애자!’는 대담무쌍한 합의에 한때 이르러 놓고도, 두 정상은 최후의 허들을 넘지 못하고 회담을 결렬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두 정상은 이듬해, 1987년 12월 8일에도 워싱턴에서 회담을 했다. 그들은 비록 전략핵을 비롯한 모든 핵무기의 철폐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나, INF(중거리핵무기) 폐기에는 뜻을 모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미키’, ‘로니’로 부를 만큼 다정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그들을 바라보던 세계인들은 냉전의 엄혹함이 누그러짐을 실감했다. 좋은 분위기는 계속 이어져, 다시 1988년 5월 29일에 모스크바에서 제4차 미소정상회담(레이캬비크는 2차였고, 1차는 1985년 제네바였다)이 열리고, 레이건은 한때 스스로가 ‘악의 제국’이라고 불렀던 나라의 수도에서 환호하는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외쳤다. 냉전은 사실상 끝났다.
  한 번의 실패에 실망하지 않고 두 번, 안 되면 세 번 회담을 거듭하고, 너무 큰 의제가 합의되지 않으면 ‘스몰딜’에 만족하면서 한때 적대했던 양쪽이 화해하고 서로 신뢰하게 되었음을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레이건-고르바초프 회담은 일깨워준다.

그러나 끝내 그런 결실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깨지는 회담도 많다. 이때는 제3자의 중재가 필요하다. 1866년 6월, 일본의 조슈 번과 사츠마 번은 도쿠가와 막부에 대항해 공동전선을 펼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츠마 대표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좀처럼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조슈와 손을 잡아야 막부에 맞설 수 있고, 막부는 이제 어지러운 일본을 이끌어갈 힘도 뜻도 없는 구시대의 유물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됐든 막부는 일왕의 명을 받들어 일본을 통치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다. 그 막부에 직접 칼을 들이대면 반역자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으니, 사츠마는 조슈를 지지하기는 하되 함께 싸울 수는 없다는 뜻을 고집했다. 조슈로서는 그런 의뭉스런 자세는 받아들일 수 없었고, 회담은 결렬 직전까지 갔다.

그때 나선 사람이 도사 번의 사카모토 료마였다. 그는 사츠마의 입장을 배려하면서도 조슈가 홀로 싸우는 곤경을 면하도록, 사츠마가 교토로 병력을 보내 조슈를 치는 막부군의 후방을 점거할 것을 제안했다. 그것은 분명 정면으로 막부와 싸우는 게 아니니 명분이 살고, 막부로서는 자칫 양쪽에서 협공받을 위험을 감수해야 하니 조슈 공격에 전력할 수 없다. 따라서 삿초(사츠마-조슈) 동맹은 효과를 본 것이다.

이 중재안이 받아들여짐으로써 동맹은 이루어지고, 결국 막부의 종말과 메이지 유신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세기의 회담에는 그 당사자들의 의지와 끈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회담의 향방에 따라 큰 영향을 받게 될 나라도 갤러리로 남아서는 안 된다. 협상의 난관을 피하고 제3의 방향을 제시할 지혜와 설득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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