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아 <아이즈> 기자

12부작으로 막을 내리는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 속 김혜자(김혜자 역)는 말한다. ‘내가 늙어보니까 알겠더라고’. 시간을 돌려 절망적이었던 과거를 바꾸면서 순식간에 젊은 혜자는 약봉지들이 없으면 살 수 없는 할머니 혜자가 된다. 그러나 절망하기는 이르다. 시간의 흐름이 뒤틀리면서 목숨을 잃었던 아버지를 살릴 수 있었지만, 그는 한쪽 다리를 잃고 절망에 빠진 가장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했던 똑똑하고 정직했던 남자는 그저 그런 직장에 취직하며 꿈이 꺾인 청년으로 살아간다. 다만 이 복잡하고 슬픈 사연을 제대로 읽어내려면 노년의 여성 배우 김혜자의 눈을 보아야 한다. 속을 알 수 없게 깊은 눈으로 영화 <마더>에서 잔혹한 살인범이 되었던 그는 이제 알츠하이머로 시간을 거꾸로 달리는 할머니가 되었다.      

얼마 전에 가수 선미는 싱글 ‘누아르(Noir)’를 발매했다. 그리고 누아르의 뮤직비디오에서 선미는 SNS 계정 안에서 철저히 연출된 자신의 모습을 실제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의 삶을 ‘누아르’ 적인 세계에 비유했다. 그동안 남성들의 세계 안에서 그려진 누아르의 모습은 암흑 속에서 상대의 움직임을 따라 멋들어지게 총을 쏘고, 서로 신경전을 벌이며 우정인지 애증인지 모를 감정을 나누는 게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진영이 프로듀싱한 ‘24시간이 모자라’로 솔로 데뷔를 했지만, 그로부터 6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에 선미는 무대 위에서 장난기를 머금고 웃다가 어느새 서늘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볼 수 있는 자유로운 여성 아티스트가 됐다. 이제 그는 직원들 앞에서 직접 콘셉트에 관한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결과물을 완성해낸다.

시청률, 관객수, 음반 판매량 등 눈에 보이는 수치와는 관계없이 지금 한국 대중문화 시장에서 여성들은 전과 다른 방식으로 빛난다. 그들에게 주어진 배역이 똑같이 엄마와 이모, 혹은 아내라고 불릴지라도 기존의 사회적 기대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여성 배우들은 그들이 맡은 배역들을 통해 JTBC <SKY 캐슬>의 섬뜩하리만치 냉혹한 한국 가부장제 안에서 여성들이 왜 희생되는지 보여주며, 영화 <미쓰백>이나 <국가부도의 날> 속의 한지민과 김혜수처럼 엄마가 아닐 때 여성이 다른 여성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혹은 자신의 욕망을 어떻게 분출하는지 보여준다. 지금의 흐름으로만 봐서는 곧 한국에서도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처럼 남성들의 치정을 그대로 여성의 몫으로 옮겨온 작품들도 탄생할지 모른다. <리틀 포레스트> 속 김태리가 연기하는 소소한 삶의 모습은 어느새 대중문화에서 하나의 서사로 자리 잡게 되고, 선미처럼 엉뚱해 보이지만 창의적이고 영리하며, 용감한 메시지를 던지는 여성 솔로 가수의  행보는 그를 닮은 두 번째 여성의 탄생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최근에 한 언론사를 통해 공개된 가수 승리와 지인들이 나눈 메신저 대화 내용은 대다수 여성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돈과 명예, 여성에 대한 소유권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묶인 남성 연예인들의 메신저 카르텔은 무너졌고, 그 시작은 분명 지금 한국에 살고 있는 젊은 여성들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가능해진 것이다. 그리고 10대 청소년들이 ‘미투’를 벌이고, 20대 청년들이 성차별적 취업 문화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와중에, 한국의 대중문화 속에서 비춰지는 여성들 또한 그 흐름에 힘입어 목소리를 낸다. 배우 정려원은 연말 시상식에서 법정 드라마를 통해 소위 ‘몰카’ 피해자를 연기했던 순간에 느낀 처절함을 논하고 정부의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배우 김서형은 여성들이 중심이 된 작품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가장 노년의 여성 배우, 김혜자까지도 ‘엄마’가 아닌 모든 노인의 삶을 그려내며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이 여성들의 모습을 보며 ‘걸크러시’라고 말하는 것은 모자라다. 온몸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현실 속 여성들과 대중문화 속 여성들의 삶은 잠깐 발광(發光)하는 것이 아니라, 눈이 부실 정도로 경쾌하고 힘차게 이뤄지고 있다. 2019년의 눈부신 여성들의 삶이고 미래의 여성들을 위한 응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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