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정 (예술문화영상학) 교수

우리는 지난 몇 년간 격변의 시절을 겪어왔다. 2014년 세월호 사건, 2016년 촛불혁명을 불러온 국정농단 사태, 그리고 작년 온 나라를 들썩이게 했던 미투의 열풍은 개인의 의식을 떠나 사회 전체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그 사이에 북핵 이슈는 끊임없이 뉴스를 생산했으며, 최저임금과 저출산, 취업 문제는 미디어의 사회면을 어지럽게 수놓았다. 각 쟁점들에 대해 사람들이 점점 극단적으로 대응해가면서 사회는 점차 포용력을 잃고 상대의 처지보다는 나를 위주로 사고하는 자기중심주의로 치달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학의 엠티나 답사도 대폭 줄였으며, 스승의 날 행사는 대부분 취소되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우리는 이제 서로에게 완벽한 타인으로 거듭나기 직전까지 왔다. 

요즘 유튜브에서 상황극을 통해 영어 회화를 강의하면서 인기를 얻고 있는 올리버 그랜트(Oliver Shan Grant, 일명 올리버쌤)는 최근 진행했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문화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바로 ‘회식’이라고 했다. 파티문화가 거의 없는 우리에게 이 회식은 동료들 사이에 결속을 다지고 공적인 일을 떠나서 자유롭게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갑질, 규율, 명령이라는 상명하복의 잔재가 여전히 작동하는 전근대적 요소가 상존하는 양가적 문화였다.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이웃에 온정을 베푸는 것을 미덕으로 삼으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우리는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이데올로기의 극심한 대립을 거치면서 아름다운 미풍양속이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사회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어떤 악순환의 고리가 존재한다. 사회를 통한 타자와의 교류가 사라지고 이 자리를 자기중심주의가 대신한다. 이는 곧 개인의 상실감과 소속감을 가속시키면서 집단의 가치를 더욱 하락시킨다. 그러면서 우리는 타인의 고통보다 언제나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더 크다고 항변한다. 그러니 한국 사회는 가히 고통 올림픽의 경연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고통과 처지에 대해서 타인 역시 무감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소리 높여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해야 한다. 내 목소리를 높이려고 하다 보니, 우리의 언어는 점점 더 강퍅해져 간다. 얼마 전에 무심코 TV 채널을 돌리다가 ‘전지적 참견 시점’이라는 예능 프로에서 패널 중에 한 분이 ‘산삼을 주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들었다. 한참을 시청하다 보니 그 표현법이 ‘당근을 주다’라는 관용어의 최신 버전임을 깨닫게 됐다. 당근 대신 산삼이란 ‘쎈’ 단어를 쓰면서 ‘말에게 당근을 주다’라는 맥락적 차원이 소거됐지만 사용하는 사람들은 이를 개의치 않는다. 10대, 20대는 ‘핵인싸’, ‘개이득’, ‘극혐’도 모자라 강조의 뜻을 가진 접두어를 몇 개씩 붙이면서 자신의 감정을 극대화시킨다. 점점 가속화되어가는 언어의 과격함이 현기증을 부르는 듯하다. ‘도대체 이러한 속도의 끝에 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회의에 빠지다가 이 강렬함은 분명 끝이 있을 것이며, 그 반동으로 언젠가는 다시 온순함과 여유로움이 찾아올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마저 품는다. 

이제, 봄이다! 겨울의 혹독함 속에서도 생명은 그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언 땅을 뚫고 싹을 틔운다. 지금은 자연의 섭리를 다시금 떠올려야 할 그런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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