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우 기자

“예전에는 지식이 많다고 노인을 존경했는데, 지금은 젊은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먼저 다 알아버린다. 그래서 오히려 노인들이 가르침을 받고 있다” 이번 기사를 준비하며 취재원과 통화를 하던 중 들었던 말이다. 이 말을 들으며 나는 문득 이번 설날 할아버지에게 이것도 모르냐며 무시 아닌 무시를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보였던 할아버지가 이젠 나에게 가르침을 받는 대상이 됐다. 이런 흐름에서 젊은 우리는 ‘신세대’가 됐고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노인들은 ‘구세대’가 됐다. 2019년 현재, 한국 사회는 ‘신세대’를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다. 

사회는 누군가가 중심이 돼서 이끄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공존하며 이끌어 가는 것이다. 65세 이상의 노인 인구가 전체인구의 20% 가까이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이 20%의 ‘구세대’들을 사회의 가장자리로 몰아내고 있다. 중심과 가장자리가 구별되는 사회가 진정한 의미의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사회의 의미는 공존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공존이라는 것은 서로 도우며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노인들이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무시하고 방치한다면 결국 우리가 늙었을 때 우리에게 돌아오는 시선 또한 지금과 같을 것이다. 우리도 훗날 개발될 수많은 첨단 기술에 앞에서 결국 ‘구세대’가 되고 말 것이다. 지금 우리가 공존하는 사회를 만든다면 ‘구세대’가 되었을 때도 우리는 여전히 사회의 중심에서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공존에 필요한 작업은 노인들의 입장에서 진행돼야 한다. 우리가 바라보는 노인들과 노인들이 생각하는 자신들은 조금 다르다. KBS 보도부가 작년 10월 일하는 노인들이 최저임금 이상을 받을 것 같냐고 묻는 설문 조사에서 청년층 10명 중 8명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노인들은 25%만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우리가 노인들의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노인들을 배려해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노인들이 원하는 배려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노인들의 디지털 소외가 심각하다는 기사를 기획하며 해결책을 쓰는 와중에도 ‘왜’ 디지털 기기 사용을 힘들어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막연하게 노인들은 디지털 기기에 익숙지 않아서라는 이유가 내 머릿속에 있을 뿐이었다.

노인들이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정보화 교육이 필요하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 적응한 우리가 무엇을 가르칠지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교육이 될 뿐이다. 우리는 노인들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 오히려 노인들 스스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교육내용을 만들어서 그들끼리 가르치도록 하는 교육이 효과적일 것이다. 노인들 스스로는 자신들이 디지털 기기 사용을 어려워하는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노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도와준다면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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