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조명과 그 아래 놓인 탁자. 그곳에 둘러앉은 군인들은 결의에 찬 표정이었다. 육군본부가 ‘제주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라’고 명령한 이후로 긴 밤이 네 번 지났다. 그리고 그들은 답했다. ‘할 수 없다’ 1948년 10월 19일 밤 9시, 14연대 소속 군인 2천여 명은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정을 반대한다’며 제주도로 겨눈 총구를 거뒀다. 그리고 여수로 향했다.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이하 반군)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4·3사건을 진압할 수 없다며 무장봉기했다. 반군은 지창수 상사 등의 지휘를 받으며 여수 시내로 진입했다. 경찰 병력이 저지선을 형성해 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20일 반군은 여수 시내 주요 기관과 건물을 장악하고 △경찰관 △각 기관장 △우익단체 회원 등을 사살했다. 그들은 여수에서 그치지 않고 순천으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몇몇의 중대가 반군에 합류했으며 이들을 지지하는 시민들도 합세했다. 반군은 세력을 확장하고자 부대를 재편해 광주와 경상도로 진격했다.

정부를 수립한 지 2개월 만에 이승만 대통령은 큰 위협을 느낀다. 정부는 이를 심각한 반란으로 규정해 병력을 총동원하고 여수·순천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남녀를 구분하지 말고 아동이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라’. 23일에 이승만 대통령이 발표한 경고문이다. 정부군은 23일 순천을 점령했으며 27일에 여수까지 수복했다. 결국 여순사건은 반군의 패배로 진압됐다.

비극은 반군이 진압된 후에도 이어졌다. 이승만 정부는 사건의 원인을 공산주의, 좌익 세력으로 판단해 반군뿐만 아니라 그들을 도운 지역 주민들도 사살했다. 색출은 지목으로 이뤄졌다. 일명 ‘손가락 총’이다. 머리가 짧고 군용 속옷을 입었다는 등의 이유로 지목당한 자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개인적인 원한과 강요된 자백으로 학살당했다. 국사편찬위원회 김득중 연구관은 “당시 정부는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압박을 느꼈을 것”이라며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지 않고 해당 지역 시민 전체를 이적행위자로 간주해 대응했다”라고 전했다.

여순사건은 전국적으로 반공이데올로기가 형성되는 결정적 원인이었다. 해당 사건 이후로 ‘빨갱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됐고 이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여순사건은 공산주의 폭동 등 이념적 잣대로 규정돼 진압됐다. 극심한 반공주의로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됐으며, 사건의 진상은 묻혔다. 김득중 연구관은 “여순사건은 통일 정부를 염원한 시민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촛불혁명과 같다”라며 “이제라도 무고한 희생자 등 정확한 진상을 파악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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